유교이야기/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하는 노력이오!/세계유교문화재단

2013. 8. 1. 11:42이하의 산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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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이야기

 

 

 

  유교(儒敎)의 중심사상은 사랑(仁)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어떻게 공부하여,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옳다고 하는 일을 실천 할 수 있는 심성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유학은 수기치인(受記治人)의 학문이다. 개인의 인격을 함양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그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난 육사도 유교의 뿌리를 둔 선비 집안의 엄격한 가통(家統)에 의해 성장하였다. 선비는 비록 고난의 가시밭길을 간다 해도 지조를 지키듯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왔다. 그때 육사의 나이가 세 살 때였다. 나라를 찾기 전엔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육사는 올곧은 정신으로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마치 구약시대 인간의 모든 죄를 씌워 황야로 내쫓던 속죄양처럼, 나라가 어려운 국면이 닥칠 때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어 광복의 영광을 노래할 것이라 예언했었다. 
 
   육사(李陸史)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록’ 보다는 ‘육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1년 7개월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운동가로서 첫발을 내 딛게 된 계기가 된다. 이때 대구 형무소에서 받았던 수인(囚人)번호 二六四번을 자신의 필명 李陸史로 사용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름이다. 조부(痴軒公 李中稙)가 지어준 이름 원록 대신 일제가 붙여준 수인 번호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그것은 일제에게 단호하게 맞서는 것만이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육사는 첫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순국하기 전까지 17번이나 구금, 투옥을 반복하게 되면서 좌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선비정신이었다. “선비는 오직 의(義)에 따라 실천함이 있을 뿐이다.”    
 
   또, 육사는 스스로 ‘활(活)’이란 이름을 지어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조선인으로서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죽음이 찾아온다할지라도 진정으로 사는 것이 이 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결국 그는 유언을 남기지 못한 채 광복 한 해 전 1944년 1월16일 중국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임시 감옥소에서 순국하였다.
 
  김종길 시인은 이육사론에서 “육사가 한편 정치적인 투사이면서도 전통적인 시관(詩觀)을 채택했고 그것을 실천한 이유도 그가 동양적인 교양인, 즉 선비의 이상을 추구했고 선비로서의 주체성을 견지한 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금강석과 같이 굳은 기백으로 유언 삼아 쓰는 것이 시라는 것을 믿은데 연유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육사가 우리들에게 남긴 소중한 정신적 자산은 선비정신이 지향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다. 배운 그대로 행동으로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쓸려고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쓴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현재까지 발표되어 있는 육사의 시는 총 40편이다. 현대시 36편 한시 3편, 시조시 1편이다. 육사가 남긴 시들은 그의 말처럼 모두 유언 같은 시다. 『육사평전』에서 김희곤 교수의 말처럼 “육사는 선비라고 하기에는 군사간부요, 그렇다고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하고 단아한 시인이라는 인상 때문에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말없고 단아한 선비요, 권총 명사수로 알려진 정치군사간부학교 출신의 그는 문무(文武)를 아우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선비 모습을 가지면서도 강한 집념을 가진 군인의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바탕엔 퇴계의 후손이자 유교 정신이 가득한 원촌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퇴계학통을 잇는 저항성과 문학성을 그는 모두 이어 받고, 또 소화해 냈다. 민족을 생각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했고, 그의 핏속을 흐르는 문학적 기질이 그를 문인으로 잡아 두었다. 그래서 그가 ‘저항시인’ ‘민족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글쓴이 이위발 시인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고,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등을 출간하였습니다.
현재 이육사문학관의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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