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6. 14:39ㆍ이하의 산문들
된장 담그는 시인
이 위 발 지음
차례
제1부
1. 눈물 흘리는 항아리
2. 따뜻한 사람이 그리운 아침
3. 메주향에서 시작되는 산매골의 봄
4. 정성을 다하지 않는 충고는 상처만 남는다
5. 아버지의 침묵이 너무 그립습니다!
6. 가난을 원수로 여기면 가난 때문에 죽는다
7.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8. 동박새 사랑 노래에 귀가 열리는 아침
9. 우리가 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지…
10.개구리들의 웃음소리
제2부
11.몸을 낮추고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12.한 편만 더 소설을 쓰고 싶다!
13.제비 몰러 나간다!
14.느낌이 가져다 준 신바람
15.만원의 행복
16.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립다!
17.국민행복시대에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18.역사는 잔인하지만 살아있음은 아름답다!
19.이 세상 천지에 나 아닌 것이 없다!
20.거미보다 못한 사람들
21.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
제3부
22.욕심과 조급함을 반성하며
23.아버지의 유언
24.인생유전
25.시는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이다!
26.애기 집
27.안개 속에 묻혀 버린 깍새를 찾아서
28.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29.빌벵이 언덕에서 울러 퍼지는 말똥굴레 노래
눈물 흘리는 항아리
집을 나서는 순간 어르신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습니다. 당신의 삶의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듯 얼굴 표정마저 애잔해 보였습니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다간 다 성사된 흥정이 틀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도 나와서 얼마에 팔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볼 뿐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처음 고향 후배의 전화를 받고 지체 없이 달려간 곳이 의성 다인이란 곳이었습니다. 트럭을 타고 34번 국도를 따라 예천 방향으로 달리면서 이번엔 어떻게 생겼을까? 모양은? 크기는? 색깔은? 혹시 깨진 놈은 아닐까? 옆에 타고 있던 집사람은 장사꾼처럼 말하는 나를 보면서 대견스러워선지, 아니면 치기어린 행동은 하지 말라는 건지, 이상야릇한 웃음만 짓고 있었습니다.
다인으로 장독을 사러가는 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설레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 또한 분위기에 따라 제 마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 노후를 생각해서 집사람이 된장을 담가 보겠다고 했을 때 저는 속으로 손뼉을 쳤습니다. 이미 장모님은 처가동네에서 장맛으로 정평이 나있던 터라 맛에 대해선 이미 검증이 되었기 때문에 장소만 마련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와룡면 이하리에 빈집을 사서 수리를 해놓고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문제는 된장 이름인데 이것저것 떠올리면서 고민을 하다가 장모님의 손맛을 이어간다는 뜻에서 함자를 따서 산매골 달분네 된장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저와 장독과의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장독보다 장맛이 좋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보잘것없지만 속 내용이 알차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한한 말입니다. 유년시절엔 아버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허우대만 멀쩡하면 못쓴다.”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모름지기 속이 차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뇌리에선 아버지의 음성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장독은 장을 담그는 항아리입니다. 된장이나 고추장, 술이나 김치를 담그는 독을 장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뜻을 잘 못 헤아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는 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를 말하고, 동이는 모양이 둥글면서 입구가 넓고 배가 부르면서 양 옆으로 손잡이가 있는 것입니다. 주로 물을 깃는데 쓰입니다. 결국 질그릇인 항아리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면서 생활환경에 맞게 모양이나 용도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학교를 마치면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부엌을 지나 뒤꼍으로 달려갔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배가 유난히 부른 컴컴한 항아리 속엔 먹을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사계절에 따라 독안에 들어있었던 먹을 것이 달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바가지에 담겨있던 홍시와 서울 사는 큰집 형님이 들고 왔던 제과점에서 만든 젤리사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말을 안 듣고 떼를 쓰면 슬그머니 뒤꼍으로 가 먹을 것을 건네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보물창고가 어디에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전 작정을 하고 뒤꼍을 샅샅이 다 뒤지고 나서야 큼지막한 항아리에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순간의 환희는 숨이 막힐 지경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제 자신이 대단하다는 단어를 깨달았던 순간도 아마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숨바꼭질하면서 도둑고양이처럼 숨죽여 달게 먹던 기억이 항아리만 보면 떠오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저는 완전범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나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어르신의 안내에 따라 뒤꼍으로 가서 본 장독은 빛이 날 정도로 유난히 반들거렸습니다. 자식들 다 도회지로 보내고 할아버지와 함께 두 분이 사시는데 장 담그는 일도 이젠 힘들어 못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값이나 많이 쳐달라고......못내 아쉬움과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습니다. 비록 빈 장독이지만 그 많은 층층시하 식구들을 거두었던 장독을 매일 닦고 또 닦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르신은 장독을 닦으신 게 아니라 매일 당신의 힘든 삶을 닦으며 자식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장독을 떠나보내는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어르신의 주름진 사이로 안개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눈물항아리’라는 시가 생각나서 적습니다. 저 자신도 편지를 쓰는 동안 이 시의 화자가 되어 어르신과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져 목젖이 떨려 애를 먹었습니다.
어머니 그리울 적마다/눈물을 모아 둔/항아리가 있네//들키지 않으려고/고이고이 가슴에만 키워 온/둥글고 고운 항아리//이 항아리에서 시가 피어나고 기도가 익어가고/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빛으로 감싸 안는/지혜가 빚어지네//계절이 바뀌어도/사라지지 않는/이 눈물 항아리는/어머니가 내게 주신/마지막 선물이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따뜻한 사람이 그리운 아침
감나무 가지에 앉은 참새들의 알람 소리에 아침잠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지난 처서 때 처음으로 모종을 사다 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배추 밭에도, 화려한 봄옷으로 치장하고 집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던 설중매 가지위에도, 서리가 내려앉아 안개꽃처럼 햇살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는 이른 아침 입니다.
옆집 어르신이 고추건조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내뱉는 기침 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힘없이 들립니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어제가 안동 장날이었습니다. 장보러 갔다가 마신 약주가 과하셨는지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목청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골목 어귀에 서 있는 가로등마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어르신은 두리번거리면서 우리 집 마당을 서성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마루에 걸터앉자마자 한숨을 섞어가며 내뱉던 말이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더러분 이놈의 세상......믿을 놈 눈 씻고 봐도 없으니.....”
작년에 배추 심어 재미 본 사람 말 듣고 따라했다가 배추 값 폭락으로 밑지고, 콩 값은 불황이 없다는 말에 콩 심었는데 친구 말만 듣고 늦게 파는 바람에 적자보고, 서울에서 떵떵거리고 산다는 앞뜰 논 주인에게 쌀 직불제 떼어먹히고 잘못했다는 전화한통도 없다고......장보러 갔다가 장은 안보고 술만 퍼먹고 왔다며 하소연하던 어르신의 눈빛이 선합니다. 그날 어르신의 흥분된 얼굴을 떠올리면 죄지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 순간에도 위로의 말보다는 동조하는 의사표시 외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어제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목민심서에 등장하는 윤지눌의 부인 이야길 해드리고 싶습니다.
정조 임금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은 다산 정약용이 벽파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였습니다. 자신의 집 뜰에 마음 놓고 공부 할 수 있는 조그만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그 이름이 '죽란사(竹欄舍)'입니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열다섯 명의 제사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날을 주회나 월회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흥(詩興)이 일어날 만한 때나 기분이 둥둥 떠오를 때 모이기로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봄이면 살구꽃이 필 무렵이나, 연못에 탐스러운 연꽃이 만개할 때나,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시회를 열기로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정약용의 집 뒤뜰에 담홍색의 복숭아꽃이 만개한 화사한 봄날이었습니다. 시회를 마친 제사들이 하나 둘 남산 밑 주막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가슴 속에 쟁여둔 울분을 술과 독설로 녹이면서 부패하고 혼란한 나라꼴이 절망스러워져 술에 몰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주막집을 드나드는 죽란시사 제사들 대부분이 외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병조좌랑과 상원군수를 지낸 윤지눌이 엽전 소리를 싱그럽게 내면서 주막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호기스럽게 큰 소리를 치며 그동안의 밀린 외상값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먼저 와있던 정약전이나 한치응, 이주신은 친구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윤지눌은 며칠 후 집들이를 할 테니 모두들 축하해주러 와달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해가 가질 않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윤지눌은 현실적인 삶의 지혜가 도무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관직을 떠난 뒤로는 언덕배기에 겨우 초가삼간을 하나 장만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허구한 날 친구들에게 얻어만 먹고 있자니 도무지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부인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털어놓고 방도를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부인이 빙긋이 웃으면서 방도를 제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이란 집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윤지눌은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닥쳐오는데 한데로 나앉을 수도 없는데 걱정이 먼저 앞섰습니다. 하지만 좀체 허투로 말을 하지 않는 부인을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서학을 공부한 서방님의 어께 너머로 깨닫게 된 부인의 지략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부인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져갔습니다. 살고 있던 집을 팔아 귀신이 산다는 흉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거간꾼을 통해 집을 내놓자마자 8만전에 산 집을 9만전에 팔고, 아무도 살지 않는 대궐 같은 흉가를 1만전에 산 것입니다. 부인의 전략은 귀신을 쫒아내고 수리를 해서 행랑채는 세를 주고, 서방님 외상술값 갚고, 몇 년 간은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계산에 넣었던 것입니다.
집들이에 초대된 죽란시사 친구들이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신들은 온데간데없고, 행랑채에 세 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만 줄을 지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어르신을 화나게 했던 대상이 친구든 정치인이든 대통령이든 상관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른 아침이 되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내년 봄 파종을 위해 거름도 내고, 하우스도 손질하고, 올 겨울을 날려면 장작도 패야 됩니다.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산매골에도 지혜롭게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그리운 아침입니다.
메주향에서부터 시작되는 산매골의 봄
소리 소문 없이 귀밑까지 바짝 다가온 봄은 산매골을 뒤덮고는 북쪽으로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동네에 비료를 실은 트럭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봄이 오는 길목마다 비료포대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봄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뒷산 상수리나무에 참새 때가 몰려다니며 짝짓기 한다고 시끄럽게 울어대고, 앞집 욱이네가 논두렁을 태우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꼬물거리는 애벌레들이 필사항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양지 바른 둑엔 털이 보송보송한 목련 봉오리가 수많은 털 강아지처럼 일제히 뛰쳐나올 것만 같습니다. 겨우내 밭이랑에 숨죽여 있던 냉이와 쑥들도 고개를 내밀고 입을 벌린 채 종달새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계댁네 마당에도 지난해 틈틈이 따서 말려놓은 두릅나물, 가죽나물, 고구마줄기가 대소구리에 담겨져 햇살과 유희를 즐기고 있습니다. 뒤 곁에 새끼줄로 엮은 시래기를 꺼내 다듬고 계시는 지례할매의 손에서도 춘심(春心)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신문지에 곱게 싸두었던 씨앗들도 하나둘씩 햇살을 보게 됩니다. 해바라기, 들깨, 호박, 강냉이, 우엉, 정구씨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썩은 놈도 골라냅니다. 이미 봄은 씨앗을 만지는 그 순간부터 점령군이 되어 온 마을을 춘정(春情)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누군가 춘심은 메주향에서부터 시작된다거나, 춘심은 밑동이 훤히 드러난 장독에서부터 온다고도 했습니다. 아마 이 말은 된장을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 해 봅니다. 된장은 음력 정월달에 담그기 때문에 봄맞이로선 가장 먼저 입니다.
산매골에 터를 잡은 지 어느 듯 두해가 지났습니다. 오늘도 퇴근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메주가 있는 방에 들어가 메주향을 맡는 것입니다. 방문을 열자마자 메주가 익어가는 구수한 향이 온몸을 감싸옵니다. 저는 남들이 얼굴을 찌푸리는 메주향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 냄새는 어릴 적 부모님 냄새였고, 제가 태어나고 자란 사랑방 냄새였고, 흙으로 지은 고향집 냄새였습니다.
오늘도 메주가 익어가는 방에 굼불을 지피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불이 잘 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불꽃의 조화는 정말 오묘합니다. 바람의 깊이와 넓이, 바람의 방향, 바람의 높낮이에 따라 불꽃이 모양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불꽃의 생김새에 따라 방안의 온도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방안의 온도는 메주가 숙성되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음력 정월이 가기 전 말날 달날에 장을 담그게 됩니다. 사실 맛있는 장을 담그려면 가장 먼저 메주를 잘 띄워야 합니다. 그래서 굼불 때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릴 적엔 천장에 메주를 메달아 놓는 두 달여 동안은 밤잠을 설치고 가위 눌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메주가 떨어질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밤만 되면 천장의 메주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주 향만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가마솥에 콩을 삶을 때 김과 함께 새어나오는 구수한 냄새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메주 쑤는 날이면 어머님 곁에 바싹 붙어 서있습니다. 냄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님이 주걱으로 떠서 넣어주는 콩이 왜 그리도 맛이 좋은지, 뜨거울까봐 입으로 불어주시는 어머님의 따스한 정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이 봄날에 메주향이 그리우신 분들에게 재래식으로 메주 만드는 법을 알려드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메주 만드는 방식은 각 지방이나 고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장모님에게 전수 받은 부분만 간략하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입동(立冬) 전 후로 해서 콩을 준비 해두었다가 김장을 끝낸 후 메주를 쑤게 됩니다. 메주콩은 반드시 햇콩이면서 국산콩으로 만들어야 장맛이 좋습니다. 우선 콩을 씻을 때 쌀 씻듯 벅벅 문질러 콩 껍질을 벗기는데 너무 문지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씨눈이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껍질은 좀 있어도 되니 너무 악착같이 문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다음에 가마솥에 콩을 넣고 넘치지 않게 적당하게 물을 붓고 불을 땝니다. 끓기까지는 센 불에 끓은 다음엔 약한 불로 뜸을 들입니다. 중간에 물이 졸아들면 누러 버리니 적당하게 물을 부어 줍니다. 콩을 삶는 개념보다는 찐다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콩을 퍼서 자루 같은데 담아 자근자근 밟아 으깹니다. 그리곤 채 같은 틀에 보자기를 깔고 콩을 퍼 담아 다시 밟아 줍니다. 그리곤 틀을 빼고 난 뒤 얼마동안 방안에 놓아두었다가 꾸덕꾸덕 해지면 짚으로 싸매어 천정에 매달아 두면 됩니다. 요즈음은 하우스 안이나 처마 밑에 메달아 두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메주를 쑤어야 됩니다. 메주가 얼어 버리면 그해 장 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메주는 전적으로 공기 중에 있는 균이 들어가 번식하게 되므로 메주 띄우는 장소에 따라 장맛이 크게 좌우됩니다. 육안으로 잘 뜬 메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겉면이 말라있고 노르스름하고 붉은색이 섞여있어야 좋습니다. 속은 약간 말랑말랑하고 쪼갠 면이 잘 떠서 검붉어 보여야 잘 뜬 메주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메주향을 타고 온 춘심이 봄밤에 내리는 늦서리에 춘정을 억누른 채 봄 인사 올립니다.
정성을 다하지 않는 충고는 상처만 남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가 문학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러운 눈빛으로 “자네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퉁명스럽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습니다. “자네는 이 길을 따라 지천에 핀 꽃들과 사계절 변해가는 풍광을 아침저녁 공짜로 볼 수 있으니 복이 터진 거지...”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꽃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복스럽게 피어있는 개나리, 참꽃, 복사꽃, 홍매화, 산수유, 조팝꽃들이 오늘따라 바람난 봄 처녀 엉덩이처럼 생기가 넘쳐납니다.
꽃망울 터트리는 소리가 봄비 낙숫물같이 환청으로 들리던 지난 이맘때입니다. 문학기행을 온 거제중학교 학생들의 해설을 맡아 문학관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서부리 국학진흥원을 지날 때였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월천서당 안내판을 보고 인솔 선생님이 어떤 서당인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월천 조목 선생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를 못해 간단하게 퇴계 선생의 제자 중 한분이시고, 도산서원에 위폐가 모셔져 있다는 정도로만 소개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인솔 선생님이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는 권유에 숙소인 농암 종택으로 갔습니다. 저녁은 뷔페 형식이었지만 식사는 종부의 손맛이 베여서 그런지 어머님이 차리신 밥상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이성원 농암 종손이 책을 한권 내밀었습니다. 손수 사인을 하신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란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다가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있었습니다.
“퇴계는 살아생전 충고를 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충고는 곧 인간관계에 상처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정성을 다하지 않는 충고는 상처만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끊임없는 충고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충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관들로부터 ‘한 번도 남의 잘잘못을 말 한 적이 없다’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월천 조목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충고를 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월천은 퇴계의 309명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충고를 받은 분이십니다. 퇴계가 월천에게 한 충고를 통해 퇴계가 왜 위대한 교육자이며, 그리고 충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충고의 수단은 편지였습니다. 퇴계는 여러 측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주목 받는 부분이 편지 교육이었습니다. 월천은 퇴계로부터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사람 중의 한 분이십니다. 생애 퇴계로부터 171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109통을 정성스럽게 묶어 책으로 남기신 책이 <師門手簡>이라는 스승의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세 가지의 직접적인 충고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격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음주에 대한 것이고, 셋째는 자만에 대한 충고였습니다.
한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월천의 나이 삼십 칠세 때입니다. 성재 금란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오담(烏潭)에서 뱃놀이를 할 때의 일입니다. 오담 소(沼)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로 조목과 금란수는 몹시 다투었습니다. 발단은 퇴계가 오(烏)자가 아무 근거 없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새롭게 풍월담(風月潭)으로 고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월천이 “어찌 제가 소유한 이 소(沼)마저 가지시려고 하십니까?”하며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퇴계는 말없이 돌아가서 곧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어제 배 위에서 한 말과 그대의 얼굴을 살피니 나의 제안은 조금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 기질의 약점은 강함과 유약함에 많이 나타납니다. 내가 보니 두 사람 모두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도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객기로 다투기만 합니다......바로 말하면 금군은 비록 유함에 가까우나 유연한데는 이르지 못하며, 가끔은 바름에 이르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강하다고 자부하나 굳건함에는 이르지 못하며, 도리어 몹시 사납고 조금도 겸손함과 공손함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덕을 해치고 일에 방해됨이 금군의 행위보다 여간 심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월천에 대한 퇴계의 충고는 정성을 다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충고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런 퇴계였기에 제자에게도 정성을 다한 글을 썼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편지였습니다.
월천은 이후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3대 제자로 성장하였습니다. 퇴계 사후 장례를 주관하고 <퇴계집>간행을 주도했습니다. 월천은 퇴계 최초의 제자이자 최후의 제자였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인연은 사후에까지도 계속 이어져 퇴계 제자 중 유일하게 도산서원 사당에 불천위로 배향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충고하지마라’는 교훈은 충고를 하는 사람이나 충고를 받는 사람 모두가 상처를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충고를 할 수 밖에 없다면 상대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공손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서 충고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실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로 제자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신 퇴계의 숭고한 정신은 우리들이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될 것 같습니다. 육우당 마당에 피어있는 매화의 떨림은 바람이 아니라 퇴계의 일성으로 가슴에 파고드는 아침입니다.
아버지의 침묵이 너무 그립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 산소를 찾았습니다. 북후면 오산리 선영 입구에 말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변함없이 먼저 인사를 합니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이미 감꽃은 떨어지고 처녀 젖꼭지만한 감이 앙증맞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동생과 함께 한식 무렵에 퇴비를 주고 가지치기를 해 놓아서 그런지 감이 많이 열렸습니다. 올 가을엔 발갛게 달려 있을 감들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옵니다.
사실 이 감나무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버스터미널을 새로 짓고 있는 맞은편 송현동에서 자랐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대부분 묘목을 사서 심지만, 옛날엔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감나무를 키웠습니다.
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진 손재주가 남달랐습니다. 아버지 손에 나무, 철사, 흙 이 닿기만 하면 농사나 살림살이에 필요한 도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접붙이는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이 감나무도 아버지 손에 의해 태어나 선영이 있던 송현동 산 21번지에서 청춘을 보내고, 오산리에 뿌리를 내린지도 십년이 지났으니 나이가 서른이 얼추 지났습니다.
아버진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영을 찾으시면 이 감나무에 유독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송현동에 모시고 있던 선산을 오산리로 이장하면서 이 감나무도 함께 옮긴 것입니다. 지금도 감나무 앞에 서면 저도 모르게 머뭇거립니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감잎을 타고와 언제 가슴을 때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오학년 다닐 때입니다. 고향마을에 불어 닥친 치맛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 집 자식엔 지기 싫다는 오기의 교육열 때문인지, 누구 집 자식은 대구로, 누구네 집 아들은 서울로 떠났습니다. 저도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서울로 떠밀려갔습니다. 먼저 올라 와 터를 잡고 계시던 큰집에서의 더부살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집에 같이 살던 한살 터울인 조카에 대한 큰어머님의 내리사랑은 노골적이었습니다. 알사탕을 가지고도 보는 앞에서 조카는 한움큼 쥐어주고, 저에겐 달랑 한 개를 던져 주시는 큰어머님의 지독한 손자사랑에 저의 상처는 깊어만 갔습니다.
결국 저는 중학교 일학년 때 큰집을 나가 독서실에서 혼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행이 뭔지도 분간 못할 촌발 날리는 시골 소년이 대도시에 나 홀로 선 것입니다. 저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잃은 것과 그토록 애타게 원하던 것을 동시에 얻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큰 어머니로부터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올라와 계신지도 모른 채, 큰집 형님 손에 이끌려 대문을 들어 선지가 한 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서 계시던 아버지의 핏줄 선 얼굴에 주눅이 들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렇게 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아프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아버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때리기만 하셨습니다. 저도 잘못했다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 뿐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부자간에 잘못과 용서의 교감이 무언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 전학 수속을 밟고 저는 아버지와 함께 청량리 발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고, 그렇게 보고 싶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이미 어머니의 품속이었고 고향산천이었습니다.
열차 안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한산했습니다. 가끔씩 심심풀이 땅콩이나 삶은 달걀을 팔러 다니는 홍익회 아저씨의 구수한 음성만이 들릴 뿐이었습니다. 열차가 원주를 지나 제천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도 아버진 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사이 잠시 졸다가 눈을 뜬 채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제 사셨는지 아버지는 손수 깐 삶은 계란 두 개를 말없이 내미시는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아버지의 행동에 저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습니다. '아버지 잘 먹겠습니다.' 란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눈물과 함께 먹던 그 계란 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입니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병실에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면 무슨 애기라도 하소?" 아버진 저녁을 깨끗이 다 비우시고, 이빨도 닦으시고는 "잘사니 됐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잘 먹겠습니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침묵이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아버지 잘 살겠습니다."
가난을 원수로 여기면 가난 때문에 죽는다
며칠 전입니다. 산매골 녹색체험마을 회원 분들과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울진 세계 친환경 농업 엑스포>견학을 다녀왔습니다. 마침 가는 날이 문학관이 쉬는 월요일이라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어르신들의 표정에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처럼 버스 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천진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옆집 어르신도 화사한 땡땡이 무늬의 블라우스를 입으시고 새로 파머를 하셔서 그런지 못 알아 볼 뻔 했습니다.
모두들 장롱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예쁜 옷들로 차려 입으시고,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트로트 노래에 손으로는 연신 박자를 맞추면서 흥얼거리십니다.
울진 대게로 잘 알려진 후포 바닷가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하늘이 맑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어르신 한 분이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는 것을 보고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십니다.
"너무 변했어! 기름 한 방울도 안 나오는데...우리가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주변에서도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라 대수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견학을 다녀온 이후로도 어르신이 무심코 뱉은 그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르신의 가슴에 맺혀있는 가난에 대한 기억이 치유되지 않은 채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산매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산매골이 녹색체험마을로 선정이 되면서부터 동네 어르신들의 의식도 바꿔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이 마을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마을을 가꾸고 다듬고 꾸미는 데 발 벗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깨달음은 우리 마을도 잘 살 수 있다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마을도 문화의 가치로서 상품이 되고, 동네에서 생산하는 농산물도 직거래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이런 변화는 동네 어르신들이 가난에 대한 대물림을 끊어 버려야 된다는 무의식이 크게 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1997년 11월 IMF로 인해 제가 다니던 출판사가 폐업되면서 시작된 가난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뜁니다.
김포공항 건너편 개화동 단 칸 방에 월세로 살고 있을 때입니다. 실직을 하고부터 일자리를 찾아 헤맨 지 몇 달이 지났을 때입니다. 어느 날 방문 앞에 20키로짜리 쌀 두 포대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엔 누가 잘못 갔다 놓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저는 취직 때문에 밖으로 쫓아다니면서 집에 쌀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다음날 쌀의 임자가 나타났습니다. 구세주는 다름 아닌 함께 시를 쓰는 친구였습니다. 사실 그 친구도 생활이 빠듯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저로선 처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쉬운 말로서 쉽게 인사치례를 하고 평생 함께 갈 소중한 친구를 얻었습니다.
"벗의 쌀독이 자주 바닥을 보인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군요. 그러나 하늘이 우리 같은 무리를 생겨나게 했을 때 이미 가난할 빈(貧), 한 글자를 점지해주었으니 거기서 도망할 길도 없거니와 원망할 것도 없소…나는 더위가 겁이 나서 보리자루마냥 앉아 있는데, 눈알에 몇 만 섬의 졸음을 쌓아두고 있을 뿐, 쟁반에는 물고기 한 마리도 없다오."
이 글은 친구에게 가난을 하소연 한 편지글 입니다. 가난은 우리 서생들의 운명이니 안달하지 말자고 조선시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덕무가 친구에게 위로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눈에는 몇 섬이나 되는 졸음을 저장하고 공부를 하지만, 밥상에는 생선 한 마리 오르지 않는 것이 글 쓰는 이들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 때의 가난했던 그 시절 그 친구의 쌀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덕무는 가난을 <이목구심서>에서 "최상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요, 그 다음은 가난을 잊는 것이다. 최하는 가난을 숨기고, 가난을 하소연하며, 가난에 짓눌리고, 가난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못한 건 가난을 원수로 여기다가 가난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얼마 전입니다. 영주도서관에 문학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으면서 온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 시간에 있었던 상상력이 가져다 준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의 강의 주제는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였습니다. 학생들은 영주 주부독서회 회원들입니다. 모두들 초등학생처럼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상상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를 냈습니다.
“어느 식당 사장님과 식사를 하러 온 교수하고, 화장실 변기가 고장이 나 고치러 온 아저씨와 이렇게 세 사람이 식당 안에 있습니다. 식당 사장이 화장실을 고친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성의로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러 온 교수가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식당 사장에게 따지는 것입니다. 아저씨의 몸에서 풍기는 인분 냄새 때문에 도저히 식사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식당 사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교수에게 밥값을 안 받고 내 보낸다.”
“식당은 서비스업이다. 교수도 냄새 나지 않는 곳에서 밥을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아저씨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식사하도록 권한다.”
“교수도 지식인이고 교양인이라면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마음을 알기 때문에 식당 사장이 잘 설득해서 함께 식사를 하도록 만든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인권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열을 내면서 배려심이 없는 교수를 다른 방으로 격리시켜야 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일반적인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제안에 모두들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식당 사장이 교수한테 가서 개그맨이 되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식당 사장이 교수한테 <인간극장>을 틀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수업을 마친 표정 하나하나엔 무언가 즐거움이 베여 있었습니다.
괴롭고 힘들거나 팍팍할 때 마음속에 상상력을 불어 넣어 보십시오. 일반적인 고정관념은 삶 자체를 딱딱하게 만들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은 삶을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봄에 피는 ‘개나리꽃은 노랗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고의 확장이 막혀 버립니다. 하지만 개나리꽃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상상력을 불어 넣으면 개나리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쳐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동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언어의 평범함에서 상상력이 확장되어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발견입니까. 또한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개나리꽃의 모양이나 꽃잎의 연약함과 봄의 이미지마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진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버리고 어머니의 고봉밥을 상상하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무조건 사랑입니다. 하지만 굳이 어머니의 사랑을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의 고봉밥엔 어머니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듯 상상력이란 ‘세상과 사물을 맺어주는 비밀스러운 끈’일 수도 있고, 새로운 발견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인문학자인 질베르 뒤랑이 ‘상상력이 이성보다 힘이 세다’라는 명언을 남겼을 정도로 삶에 있어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단풍이 너무 고운 이 가을에 넉넉한 마음으로 상상력의 바다에 한번 빠져 보시길 바랍니다.
고 서정주 시인에겐 아침저녁으로 더러운 재떨이를 깨끗이 씻어주는 늙은 아내가 있습니다. 둥근 재떨이가 보름달처럼 고운 양귀비 얼굴로 상상력이 확장됩니다. 그 모습에 취해 조그만 칭찬에도 좋아라하는 아내와 천국으로 함께 갈 생각이랍니다.
“내 늙은 아내는/아침저녁으로/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내가/“야 이건/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하면/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그래 나는/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그녀와 함께/가 볼 생각이다. -<내 늙은 아내>전문
동박새 사랑 노래에 귀가 열리는 아침
이른 아침입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뒤 안 문을 여니, 감나무 가지를 스치고 동박새 한 쌍이 날아갑니다. 지난 가을 따다 남은 까치밥을 먹고 가는 가 봅니다. 붉은 감들은 이제 제 빛깔을 잃어버린 채 이미 말라져 가고 있습니다. 떨어진 감꼭지 밑으로 서리가 하얗게 앉았습니다. 시린 가지들은 바르르 떨다 허공을 가리키며 멈춰 섭니다.
매일 이맘때 쯤 찾아드는 동박새지만 어디서 이 추운 겨울을 나는 것일까. 여명과 함께 찾아드는 경쾌한 소리가 오늘따라 살갑게 느껴집니다. 반갑다. 살아 있었구나. 영하의 날씨에도 견뎌주어서 고맙다.
집 주변의 새들은 여러 쌍인데, 이들은 이미 낯이 익어 얼굴을 알 것 같습니다. 소리를 들어서도 분간이 갈 정도입니다. 날아다니는 이동경로 또한 알고 있습니다. 첫 울음 소리는 목련나무 몽우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곤 앞집 지붕위로 날다가 조금 후엔 은행나무 가지를 지나 전선줄을 타고 뒤 산 아카시아 숲으로 사라집니다.
서리 내린 날 동박새는 아주 분명한 형태가 됩니다. 녹색과 하얀색의 대비가 명쾌합니다. 수묵빛 하늘, 무서리가 하얗게 덮인 나뭇가지들 속에서 동박새는 더욱 빛이 납니다.
동박새가 날아가는 쪽을 보니 앞집 할매네 우거진 개나리 가지사이에 신방을 차릴 모양입니다. 쉴 새 없이 드나들더니 신혼집의 형틀이 조금씩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금자리는 눈여겨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안온해 보입니다. 올 겨울 큰바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가늠해서 집을 짓는다는 새들의 지혜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숙연해집니다. 찬바람을 가르며 산비탈 아래 논의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는 이들의 날갯짓은 아주 사랑이 넘쳐납니다. 이제 뒤 곁 텃밭에 그들을 위해 먹이를 던져놓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사랑에 빠져 주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 지붕 위에서 재잘거리는 동박새 소리에 귀를 열어 놓고 제 마음 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밖을 보는 눈이요. 다른 하나는 나를 보는 눈이라고 했습니다. 밖을 보는 눈으로는 밖의 사물을 살피고, 내부를 보는 눈으로는 이치를 살핍니다. 그런데 어떤 사물도 이치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를 보는 눈은 현혹되기 쉬우므로 반드시 내부를 보는 눈에 의해 바로잡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재야 문인인 이용휴는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외물을 보는 눈이 아니라, 이치를 발견하는 눈, 즉 내부를 보는 눈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살던 유년시절 고향집에도 동박새는 늘 탱자나무 울타리 가지사이에 집을 지었습니다. 찔레나무에도 집을 짓고 개나리 가지 사이에도 집을 지었겠지만 제가 본 것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탱자나무 가지 사이였습니다. 녹색의 색조가 어린 제 마음에도 황홀한 빛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새의 이름을 아버지한테 들으면서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기억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고향마을로 들어오는 신작로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조각구름보다 동박새집에 더 눈이 갔습니다. 친구들은 새들에게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흔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신작로를 따라 하늘을 찌르듯 의젓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들을 황홀하게 바라볼 때도 있었습니다. 미루나무는 잘 정돈된 머리를 휘날리며 멋진 신사처럼 언제나 우뚝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미루나무들을 나는 좋아했습니다. 먼지 날리는 여름날엔 미루나무 사이로 그림자놀이를 하듯 곡선을 그으며 오랫동안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이파리들이 가지런히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잔물결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소리를 내며 머리 위에서 새가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경쾌하게 울어대었습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귀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아마, 그 새가 동박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울 아침 햇살이 창호지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의 <풍장>이란 시를 떠올려 봅니다. "내 세상 뜰 때/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이고/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소리만 듣고도 비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귀 그냥 두고 가리
우리가 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지…
오늘 아침 출근길도 어김없이 보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해도 그쪽으로 눈길을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와룡면 감애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에 회색빛의 원통들이 하늘을 향해 꽂혀있었습니다. 여남은 개의 통들 사이로 녹지 않은 잔설들이 쌓여 있고,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참새 서너 마리가 통 위에 앉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 속에선 숨구멍 같은 원통을 통해 목숨을 연명해 가는 소의 눈물들이 흐르고 흘러 지하수처럼 넘쳐 올라오진 않을까. 가당찮은 상상력이 발동되자 순간적으로 온몸을 휘감듯 전율이 일었습니다.
출근하기 전 신문을 보다가 고은 시인이 구제역 파동 속에 생매장 당하는 가축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장시를 보내와 실었다는 조시를 보면서 저도 눈시울이 붉어 졌습니다. "무슨 달밤으로 그대들의 명복을 빌겠습니까/무슨 달밤의 낯짝으로/그대들의 생무덤에 대고/(중략)/삼가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야 하겠습니까/묻힌 그대들이여/아직 언 땅 찍어낸 흙구덩이 속에서/다 죽지 못하고/마지막 헛발질을 하고 있습니까/혹여 남은 한 마디 울부짖음 꽉 막혀/꿈틀대다 말고 있습니까/"(중략)
저 자신도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지만 이렇게 가축을 위한 슬픈 조시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분법 적인 단순한 진리이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구제역 발생으로 인해 수백만의 가축이 살 처분되어 땅 속에서 울고 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얼마 전 제 고향 영양에서도 구제역이 발생되고 난 뒤, 대구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평소 말이 없던 친구였지만 전화 음성으로도 알 수 있듯이 울먹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노모의 연락을 받고 고향집으로 달려가 직접 본 것을 저에게 하소연하고자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밭을 갈고 논을 썰던 내림 소를 죽여야 한다는 수의사의 말을 듣고 친구의 노모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말렸다고 했습니다. 같이 죽는다고 떼를 쓰기도 했답니다. 노모는 자식 같았던 당신의 대화 상대였던 그 내림 소를 소로 생각하지 않았 고, 말만 못할 뿐 벙어리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굵은 눈꺼풀을 껌벅이며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히면서 소는 주사 한방에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뒷산 입구에 파묻으면서 친구도 같이 노모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지나온 마을 주변에 있는 썰렁한 우사엔 죽은 소의 뼈처럼 앙상한 파이프만 겨우 붙어 있고, 바람을 막으려고 쳐 둔 비닐은 뜯겨져 겨울바람에 속절없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적만이 흐르고 있던 우사에서 갑자기 뛰쳐나올 듯 성난 황소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근래에 읽었던『몸의 역사와 몸의 문화』란 책 속에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몸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마음은 비물질적인 존재로서 정신적인 차원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몸이라는 것은 전일적 방식이든 분별적 방식이든 관계없이 몸이 살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자연의 일부이듯,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없어진다는 것도 자연이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곧 자연이 행하는 것이라고 간절히 믿고 싶을 뿐입니다.
개구리들의 웃음소리
와룡면 이하 마을에 집을 짓고 상량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곳에 이사와 살면서 시내에선 노력해도 되지 않던 것이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일어나는 생리적인 변화였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는 것입니다. 아내 말로는 늙어가는 현상 중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노안이고, 그 다음엔 아침잠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도 완강하게 부정은 했지만 부정이 긍정을 낳는다고 마음속으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저에게 아침마다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새소리 때문입니다. 어떤 새인지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리가 너무 특이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알람 같은 새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청각이었습니다. 닭 훼치는 소리, 개짓는 소리, 도랑물 흐르는 소리, 앞집 어르신 기침소리, 요즈음은 고라니의 울부짖는 소리도 자주 들립니다. 며칠 전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막내딸이 지나가는 어투로 내뱉은 말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개구리 울음 소리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개구리들은 지금 우는 게 아니고 웃고 있다고 생각하면 시끄럽다는 생각이 사라 질 거”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집이 앞뒤로 논이어서 그런지 해가 질 무렵이면 유난히 개구리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얼마 전 옆집 할매가 밤늦게까지 밭에 나가 일하다 햇감자를 건네주시면서 “저 개구리들은 전생에 무슨 업을 많이 지었길래 저렇게 밤만 되면 울어쌓는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지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개구리 울음 소리에는 개구리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턱밑에 울음주머니가 있는 청개구리가 있고, 양쪽 볼에 울음 주머니가 있는 참개구리도 있습니다. 개구리는 허파로 호흡하면서 울음주머니를 풍선같이 부풀려 울음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우는 소리를 내는 개구리는 모두가 수컷입니다. 그 소리는 암컷 개구리를 유혹하기 위해 우는 것입니다. 암컷 개구리는 수컷 개구리가 울 때 마음에 드는 소리를 내는 수컷을 찾아가 자기 몸을 부비면서 스킨십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짝짓기를 하는 개구리들이 이 밤이 이슥하도록 미혹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울음은 사랑을 부르는 세레나데인 것입니다. 오늘도 암컷개구리에게 실연의 상처를 입은 개구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자신의 아픔을 위로할 것이고, 짝짓기에 성공한 개구리는 아름다운 신혼의 꿈에 부풀어 더욱더 울어댈 것입니다.
천둥번개와 같이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가고 희미하게나마 달이 얼굴을 디밀고 있는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 밤에도 수많은 개구리들이 서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노래 소리의 울림은 원초적인 생명력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막내딸에게 다시 이야길 해야겠습니다. 다가오는 너희들 세상과 그 다음의 세상에도 개구리의 울음이 사랑의 웃음으로 들리길 바란다고 말입니다.
욕심과 조급함을 반성하며
폭설이 내리던 날, 나는 약속 장소인 창 넓은 카페에서 함박지게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창밖의 풍경에 동화되어 버린 나는 기다림의 조급함보다는 멈춰버린 현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백년 만에 내린 때 아닌 춘설은 고장 난 시계추마냥 도시를 온통 느림의 미학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눈송이들은 허공을 흥겹게 나풀거리며 시원하게 드로잉을 펼치고 있었고, 흰색의 점묘로 그려진 그림 같은 배경은 삭막한 빌딩들 사이로 넉넉한 공간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어느 화가가 자연이 그리는 이 장엄하고 환상적인 풍경화를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열자 상대방의 목소리가 다급함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차가 옴짝달싹하지 못해 약속을 지킬 수 없노라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어져 버렸습니다.
밖을 나왔을 땐 이미 온 사방이 눈으로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나무에 내려앉은 눈은 꽃이 되어 있었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에도 눈꽃들이 피고 있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무위도식하는 지식인 시마무라와 청순하고 아름다운 기생 고마코의 슬픈 사랑이 이 순간에 떠오른 건 왜였을까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거리를 걸었습니다. 서로 다른 형태의 건물과 가로수에 내려앉은 눈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되묻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차들 지붕 위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백설기 같은 눈을 잔뜩 이고서 힘이 부치는지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차들은 도로 중간에 멈춰 서있고, 운전수는 연신 핸드폰을 눌러대고 있었습니다. 문명의 이기(利己)들이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꼬랑지를 내리고 패배를 선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내를 벗어날 지날 즈음 도로 옆 화단에 누군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눈사람은 한껏 폼을 잡고 빙긋이 미소를 띠운 채 보란 듯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잔잔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눈사람이었습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욕심 부리지 말고 순수한 감성으로 순리대로 살게.”
바쁘게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순리를 거스르며 금욕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정치판은 국민을 빙자해 명분과 대의를 무시한 채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경마나 카지노에 한탕을 쫒거나, 로또의 대박이 불러오는 상실감과 ‘아침형 인간’이 최고의 가치인양 치부되고, ‘한국의 부자들’,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현실입니다. 삶의 가치를 금전만능에 두고 그것을 위해 올인 하는 사회분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신용불량자나 자살로까지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모두들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합니다. 한가롭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절 수 없다고 합니다.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피에르 쌍소의 이야기입니다.
사월에 내린 춘설이 조급하게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잠시 멈춰 여유롭게 세상을 살아가라는 자연의 조용한 가르침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의 유언
처음 명함을 받았을 때 명함 색깔이 무척 야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진홍색의 바탕에다 노란 금박을 입힌 글씨로 까르뜨 뷰티 숍 원장 레드킴이라고 선명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한쪽 손엔 명함을 들고, 한쪽 손으론 악수를 하면서도 머리속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이 친구가 언제 직업을 바꾸었지, 미용 학원을 차렸나? 아니면 숍을 낼 정도로 유명 의상 디자이너로 성공을 했단 말인가? 이십년 만에 그것도 어둠이 깔린 도시의 빌딩 숲 구석진 골목, 보양탕 집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리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너! 석천골에 살던 준섭이 아이가! 야! 임마 정말 반갑다!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한 이십년 댔쟤!”
"니는 변한게 하나도 없다! 한눈에 닌 줄 안 알아 봤나!"
내 기억으로는 이 친구를 고향 떠나기 전까지는 김덕팔이라고 불렀습니다. 팔 남매 중 막내로 고추 달고 태어난 그에게 덕 많이 쌓고 살라며 덕팔이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너무 뜻밖의 만남인지라 덕은 생각이 안 나고 팔만 입 안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명함에 적힌 레드킴과의 이질적인 거리감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짧게 깍은 머리를 무스로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짝퉁인지 이미테이션인지모를 굵은 금목걸이와 금팔찌에, 흘려쓴 영어 글씨의 로고가 박힌 토스카나를 입은 모습은, 이십년 전의 김덕팔이로 불러주길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야! 너 아직도 글 쓰고 있나? 얼마 전에 고향 들렀다가 니 소식 안들었나! 그래! 지금은 어디 살고 있노? 애는 몇이고? 제수씨는 뭐하노! 어르신은 잘 계시고?"
급한 성격은 어릴 적과 변함이 없어 보이는데 행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 습니다.
예를 들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사용할 때의 여성적인 부드러움, 술을 따르거나 먹을 때의 제스처, 안주를 먹고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을 때의 모습들이 그랬습니다.
칠년 전이었던가 중학교 재경 동창회 때 동창한테 들은 얘기로는 덕팔이가 울산에서 미용 학원에 다닌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덕팔이는 나에 대한 기본적인 궁금증이 풀렸는지 나와 함께 동석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간단하게 수인사를 하고는 나하곤 어릴 때 둘도 없는 부랄 친구라며 술잔을 편집장에게 줬습니다. 편집장이 장안에선 맛 집으로 유명한 집이라며 데리고 온 것인데, 덕팔이를 만날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우리들 보다는 일방적으로 덕팔이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내 단골집인데! 사장인 욕쟁이 할마시가 사위 삼자고 자꾸만 보챈다 아이가! 근데 딸내미는 코뻬기도 못봤다 카이!"
이미 취기가 오르는지 덕팔이가 대화의 주제를 잡지 못하고 갈지자를 걷자, 옆에 있던 편집장이 눈치를 주면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원고는 내일 출판사로 갔다주기로 하고 편집장을 보내고 난 뒤, 덕팔이도 잠시 앉았다간 자기도 숍에 가봐야 된다며,
“친구야! 니 시간 나는 데로 내 숍에 꼭 한번 온나! 그때 만나면 한상 딱부러지게 사꾸마!"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덕팔이 아버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덕팔이를 만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 그 사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강원남도로 불릴 정도로 오지인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은 조그만 면 소제지엔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은 몇 집 안 되고, 옛날부터 뿌리를 내린 박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어 박씨 집성촌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만나면 모두가 택호 끝에는 할배, 아재, 형님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일어난 좋은 소문이든 안 좋은 소문이든 그 소문으로 인해 족친끼리 멱살까지 잡는 일이 가끔 생기기도 했습니다.
장터를 따라 올라 가다 보면 양조장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두 평 남짓한 크기의 청운 이발소가 있었습니다. 그곳 주인이 바로 덕팔이 아버지였습니다. 다리를 절면서도 군에서 배운 이발 기술로 어렵게 꾸려 나가고 있는 덕팔이 아버지 말에 의하면, 하루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대꼬챙이 같은 풍천 할배가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 와서 상투를 잘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풍천 할배요! 상투 짜르고도 후회하지 않을 꺼지예! 지 소견인데요, 할배 연세도 그렇코, 문중 어르신네들도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코, 지는 못 짜르겠심더......”
“빨리 짜르거라! 내 다 생각이 있어서 안카나! 퍼뜩 짜르거라!”
결국, 상투에 가위를 댄 덕팔이 아버지는 문을 열고 나가는 풍천 할배 뒷머리를 보면서 뭔가 자신이 잘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 온 면소제지를 떠 다녔습니다. 이발소 앞을 지나가던 풍천 할배를 덕팔이 아버지가 붙들고선, 요즘 같은 시대에 상투 틀고 다니면 사람들이 우습게 볼 뿐더러 비위생적이라며, 무작정 이발소로 데리고 들어가 안자르겠다고 버티던 풍천 할배 상투를 잘라 이발비만 챙겼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으로 인해 덕팔이 아버지는 결국 이발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풍천 할배를 찾아가 빌어도 보고, 주변사람들에게 풍천할배가 먼저 잘라달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 해봐도 누구하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양반이 어떤 양반인데 스스로 찾아가 상투를 잘라!’
6.25전쟁으로 인해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먼 친척뻘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박씨 문중이 사는 이곳에 들어와,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허드레 일에서부터 머슴살이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는 또다시 이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산청 할배 집에서 몸종을 하던 여자와 결혼 한 후, 일가친척도 없던 그에게 유일한 목표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식들을 위해 푼푼이 모은 돈으로 이발소를 차려 겨우 식구들 밥 먹고 살아가는데 문을 닫게 되었으니 막막하였던 것입니다. 박씨 문중의 힘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때가 덕팔이와 내가 중학교를 졸업 할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 덕팔이 아버지는 자식들에겐 절대로 가위질하는 직업을 하지 말도록 머리에 못이 박히도록 시키면서도 이곳을 떠나질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 나로선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온 김에 레드킴 명함을 들고 압구정동 현대 백화점 쪽으로 덕팔이를 찾아 갔을 땐, 벌써 어둑하게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젊음의 거리답게 온통 외제 상품들이 형형 색깔로 즐비하게 늘어서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유소를 지나자 도로가 옆에 까르뜨 뷰티 숍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나는 최고급 실내 인테리어에 주눅부터 들었습니다. 카운터 아가씨에게 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아가씨는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레드킴에게 아니, 덕팔이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주스를 갖다 놓았습니다. 몇 분을 기다리자 덕팔이가 코트를 입고는 헤어 숍 건물 지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숍에서 기다리면서 궁금증이 동했던 나는 덕팔이 직업에 대해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니 아부지는 그 사건 때문에 결국 돌아 가셨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이 일을 어떻게 하게 댔노?
“나도 그때 생각하면 박씨 문중 씨들을 다 죽이고 싶도록 안 미웠나, 근데 지금 하는 얘기지만, 아부지 돌아 가실 때 내가 임종을 안 봤나! 여기는 내 고향이다! 내가 묻힐 곳이다! 그라이, 니도 여기 사람들 미워하지 말고, 열심히 살거라! 그때 그 일은 너희들에게 말 못했지만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볼려고 한 짖이다...덕팔아...미안하데이...
인생 유전
밤만 되면 소리 소문 없이 찾아드는 짙은 안개 때문일까. 안개 마을엔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는 시골집의 지붕들이 유령의 섬처럼 보였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나타납니다. 인근 면소재지가 신도시로 편입 개발되면서 대조적으로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입니다. 안개만 해도 그렇습니다. 신도시 주변의 경관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만든 인공 호수로 인해 아침이 되어도 마을은 여전히 안개로 덮여 자욱한 것입니다.
마을 초입 한 구석. 보기에도 다 쓰러져갈 듯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칠성씨는 때 묻은 검은색 비닐 가방을 습관처럼 쓰윽 열어 보고는 어깨에 둘러멥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의 도시락을 챙겨 넣어 주며 말없이 한숨을 낮게 내쉬곤 등을 돌린 채 이부자리에 엎드려버렸습니다. 그런 아내의 한숨이 오늘은 칠성씨의 가슴에 왠지 예사롭지 않게 들어와 박힙니다.
안개 마을로 들어온 지 이 년이란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필요한 말 외엔 아내와 눈빛과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부부간에 약조한 사항은 아니지만 그건 서로 간에 지난 일을 들춰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는 묵시적인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칠성씨는 그런 아내에게 얄미움보다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자신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준 아내가 아닌가.
올이 허옇게 배를 뒤집어 내놓은 밤색 골덴 바지에, 아무리 성능 좋은 세탁기에 빨더라도 때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누렇게 변색된 잠바를 걸친 칠성씨는 언뜻 보아선 환갑은 지나 보입니다. 검게 탄 각진 얼굴엔 골 깊은 주름살이 이년 사이 더 늘어나 있고, 유독 튀어 나온 광대뼈로 인해 지하 천 미터 막장에서 막 올라온 광부처럼 보입니다. 물론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 할지 몰라도 그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칠성씨를 감싸는 안개는 새벽공기에 떠밀려 저 끝 모를 곳으로 재빠르게 미루산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꾸었다는 태몽이 북두칠성이어서 칠성이라는 이름을 칠성 드리듯이 지었다는 칠성씨. 칠성씨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이놈이 장차 천씨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흐뭇하게 고추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달고 다닌 지가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의 칠성씨의 역정은 일 년 전 아버지가 마지막 유산으로 남겨 주고 간사건 만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침저녁 밥상에 앉아 입에 달다시피 읊조리시던 ‘우리 집안에 공무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죽어서도 원이 없겠다…”던 간절한 소망은 칠성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 칠성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들 다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포기한 채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삼 년 만에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마치 당신이 큰 벼슬이나 한 듯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칠성씨는 삼 년에 걸쳐 세 번이나 쓴잔을 마신 칠성씨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이기에 좀 과하다 싶은 부친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제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옆집에 사는 병호 사촌을 아침부터 불러 손수 쓰신 ‘산정리가 낳은 천칠성 국가 공무원 합격’이라고 쓴 현수막을 동구 밖 정자나무에 달아 놓으라고 지시하곤, 빠른 걸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기별을 하기 위해 뛰어 나가셨습니다. 그러더니 뭔가 잊은 듯이 되돌아와선 돼지우리로 달려가시며,
“오늘 같은 날 돼지 안 잡고 언제 잡아!…”
돼지 목을 따는 흉내를 내시던 아버지. 그 모습은 실성한 사람에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어쨌든 칠성씨는 타의든 자의든 천씨 집안에 유일한 공무원이 되었으며, 동네 어르신들은 부추기듯 한 마디씩을 하셨습니다.
“이제 칠성이네는 먹고 사는 건 문제 없겠어"
이런 말을 듣고 있던 칠성씨도 내심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칠성씨가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은 인근 면소재지인 다슬면 농촌지도소였습니다. 그곳을 시작으로 청포면 산림 계장으로 퇴직하기 전까지 삼십여 년 동안 옹골차게 한 길만 걸어 왔습니다. 단지 서운함이 있었다면 아내의 부실한 몸으로 인해 자식 농사를 풍성하게 짓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뿐,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로선 그 아쉬움을 천운으로 돌리며, 외아들이지만 집안의 대를 이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천씨의 집안 내력은 동네가 다 아는 머슴 집안이었습니다. 칠성씨의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온 머슴이란 딱지를 세상이 바뀌면서 아버지 대에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천씨네를 부리던 유씨 종가 집에선 마지막 세경으로 알짜배기 논 세 마지기를 주었습니다. 당시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후한 세경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논을 밑천으로 불려 나간 천씨네 재산은 칠성씨가 중학교를 들어 갈 즈음엔 동네에서 알부자 소릴 들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부친의 가슴 밑바닥에 맺힌 한은 부자라는 지칭으론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씨 종갓집 막내아들이 대동아 전쟁에 끌려갈 위기에 처해 있자 유씨 집안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면서기와 짜고 쌀 열 가마를 주는 대신에 연령이 비슷했던 칠성씨 할아버지와 영장을 바꿔치기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끌려간 할아버지는 이듬해 유골이 되어 돌아왔으나 그 유골마저 어린 아버지로선 보질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제사도 방 안에서만 지낼 수 있을 뿐 제사를 지낸 후에도 산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는 것을 삼갔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와도 아버지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불호령을 쳤습니다. 유씨 집안에서 아버지께 세경으로 준 논 세 마지기는 할아버지에 대한 보상일 것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 식구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친으로선 그 맺힌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자식만큼은 관직에 앉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고향 마을이 광역시에 편입되면서 땅값이 오르게 되자 당신이 일구어 놓으신 땅을 팔아 도시로 진출해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참에, 이곳을 떠나 평생 머슴의 후손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내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다른 면에 근무하고 있던 칠성씨에게 전화로 부탁을 하며, 당신의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써왔습니다. 하지만 칠성씨가 강하게 거절을 하자 이번엔 직접 찾아와 마지막 부탁이라며 애원하다시피 천씨 집안의 역사까지 들먹이며 통사정을 했습니다.
“너도 공무원이니까 줄이 있을 것 아니냐! 이 애비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렇게 해서 소개를 받은 군 건축 계장과 아버지는 손을 잡았습니다. 절대농지를 대지로 둔갑시켜 자그마치 계약금 일억을 당좌 어음으로 받고 중소 건설회사의 사장에게 등기를 이전해 주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금 치를 날이 지났는데도 계약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소문해 보니 그만 토지 사기꾼에 걸려들었다는 것입니다. 한 달도 채 안되어 등기부 등본엔 땅 주인이 두 번씩이나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토지는 토지대로 다 날리고, 그 사기꾼이 검거되자 사건 전말이 속속 드러나면서 아버지와 건축 계장도 토지사기사건 담당 형사에게 붙잡혀 쇠고랑을 찼고, 그 가운데서 다리를 놓아준 칠성씨도 직장에서 정직처분을 당하곤 가까스로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동안 한 길만 알고 걸어왔던 칠성씨. 그는 퇴직금은 고사하고 살던 집까지 가압류 당해 오도 가도 못하는 빈 쪽박이 된 자신의 처지가 꿈같았습니다. 더욱 칠성씨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동네 사람들이 수근 되는 것이었습니다. 머슴 주제에 봉황을 잡으려다 미꾸라지도 못 잡고 패가망신한 집안의 이력을 들춰내며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가시고 해가 바뀔 무렵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면회를 가시곤 했습니다. 그 와중에 신호등이 바뀐 것을 못 본 채 정신없이 건널목을 건너다 그만 달려오는 택시에 치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머니 장사를 치루고 난 뒤 칠성씨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나도 곧 따라 갈 텐데…”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칠성씨의 불명예 퇴직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순간적으로 눈에 광채를 띄우시며 “칠성아! 석현이는 내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걔는 태어날 때부터 강골체질로 태어나 운동을 잘 하니까, 싸움은 잘 할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석현인 경찰관이 딱 적성에 맞을성싶다! 니 생각은 어떠냐?… 꼭 그렇게 하도록 해라!”
칠성씨는 얼마 되지 않는 가재도구를 등에 지고 아내와 석현이를 데리고 동구 밖을 나오면서 정자나무에 걸려 있던 현수막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천씨 집안이 머슴 집안이었다고 수근 대지 않는 곳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기 열흘 전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뇌신경이 터져 뇌출혈로 쓰러져 결국 어머니를 따라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유산은 교도관이 건네준 쪽지 한 장이었습니다. 그 쪽지에 적혀 있는 유언에 따라 유시 종갓집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어머니와 함께 합장을 했습니다.
안개마을에서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신도시에선 하루 종일 기계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도시 한 켠에 처음으로 준공검사가 끝나 입주가 완료된 칠 층짜리 고급 빌라 두 동이 공룡처럼 입을 벌리고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그 속으로 칠성씨는 마지못한 발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칠성씨는 그랜드 빌라 입구 안쪽에 있는 경비실 문을 힘없이 밉니다. 칠성씨가 들어서자 맞교대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심씨가 먼저 말을 건넵니다.
“어제 천씨 아들 보니까 꼴이 말이 아니던데… 어떻게 된 거야!”
칠성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근무일지를 건네받아 특이사항이 없는지만 물을 뿐입니다. 말없이 의자에 꺼지듯 주저앉으며 담배를 찾는 칠성씨에게 심씨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사물을 주섬주섬 챙깁니다. 그리고는 건성으로 인사말을 건네고 자전거를 타고 정문을 빠져 나갑니다.
칠성씨는 어제 새벽 교대 시간에 누구에겐가 쫓기듯 찾아온 아들놈 석현을 떠올리며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었습니다. 지폐를 있는 대로 달라기에 양말 속에 끼워 둔 비상금까지 쥐어 주자 황급히 도망치듯 사라진 석현이. 그런 아들 녀석을 보면서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천씨 집안의 운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석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 유언대로 경찰 시험을 친다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먹고 사는지 공부는 잘 되고 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저께 아홉시 뉴스에 아들놈 얼굴이 보인 것입니다. 경찰시험을 치던 수험생에게 정답을 핸드폰으로 알려준 천석현을 수배 중이라는 아나운서의 말을 잘 못들은 걸로 치부하고 싶었습니다. 어제 이곳을 찾아온 석현이 놈의 꼬라지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대놓고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나마나 조금 후면 형사들이 이곳 경비실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칠성씨는 들이켰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습니다. 깔깔한 입 안으로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즐겨 불렀던 한 오백년의 가락이 맴을 돕니다. 입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려집니다. 칠성씨의 낮게 깔리는 노래 소리가 신음 소리인 듯 처절하게 경비실 안을 맴돕니다.
시는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이다
새벽만 되면 소리소문 없이 나를 찾아와 온몸으로 감싸 안고 열정적으로 애무를 하는 당신. 오랜 기다림에 지쳐 이젠 나를 놓쳐 버리기 싫다는 듯이, 저는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과 사랑의 유희에 빠져 새벽잠마저 비몽사몽이 됩니다. 당신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애간장을 태우곤 사라집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저는 당신에 의해 서서히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났다간 미소를 띤 채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 저는 당신의 아름다운 뒷모습에 취해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습니다.
안개, 저는 당신의 숨결마저도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저의 고향이고, 어머니고, 사랑스런 애인입니다. 안개도시가 안동이라고 하면 어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인해 안개는 이미 안동의 명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은 고향이자 영원한 저의 모천(母川)의 자궁인 것을 …… 사랑합니다. 안개여!
안동에 내려온 지 십년, 서울에서 15년 동안 출판사를 전전하면서 고향에 내려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돌아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고향은 저의 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시는 고향입니다.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입니다. 제 자신의 조급함에서 오는 이 세상의 모든 슬픔들의 고향이며, 우리가 영원히 가슴에 안고 뒹굴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곳에나 시를 흘려버리고 달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돌고 돌아 원천의 땅에 저는 다시 서 있습니다. 물안개의 눈꽃이 되어……
“아침이 되면 의관을 갖추고 정좌를 하신 후, 사서오경을 펴놓고 사랑방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시던 할아버지, 꼿꼿하면서도 대쪽 같은 성격이셨지만 눈빛만은 연못에 담긴 달처럼 그윽하셨다. 시골에 사시면서 흙 한번 손에 묻히지 않고 할머니의 근심 어린 눈길마저 외면하시던 할아버지, 천자문을 배우다 딴전을 피운다고 담뱃대로 정신이 번쩍 들게 꾸지람하시던 할아버지,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마지막 선비의 길을 가시다 외로운 생을 마감하신 할아버지……”
첫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의 서문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안동에서 40분 거리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입니다. 사람들은 동네 이름을 ‘논실’이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영양의 주봉(主峰)인 일월산의 끄트머리 시루봉을 양옆으로 끼고 탕건봉, 독점재, 장수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쑤는 마을의 상징인 신의 숲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들과 잡목이 숲을 이루고 있고, 매년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앞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천연기념물 장수나무는 집에서 얼굴만 들면 바로 코앞에 있었습니다. 장수나무(만지송)는 수령이 40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용트림을 하듯 웅장한 모습으로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조선시대 인조(1640년) 때 함자 李자 時자 明자를 쓰신 석계(石溪) 할아버지가 병자호란을 피하기 위하여 석보에 정착하면서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석계 할아버지의 10대 손인 정우제(定宇濟) 할아버지의 장손입니다. 소설가 이문열이 항제(抗濟) 할아버지의 13대 손입니다. 항렬로 따지자면 저보다 3대가 낮아 손자뻘이 됩니다. 항렬이 높아 아직도 문중 모임에 나가면 ‘할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유교적인 집안에 태어나 마지막 선비이셨던 할아버지의 품에서 저의 문학의 꿈이 싹을 틔웠습니다.
이끼 낀 장승의 갈라진 틈 사이로 어둠이 뽀듯이 가슴 미어져 오는 마을, 누각의 풍경 소리는 어둠 바깥으로 나를 밀어내고, 뒷산 성황당에서 울리는 알지 못할 주문에 당방울이 달린 당대의 떨림을 타고, 마을의 서낭신인 갑자생 재령 이씨 각시탈을 쓰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무동을 타고 이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음산했던 당방울 소리는 갈잎의 미세한 떨림으로 남아 있을 뿐, 그림자를 따라오던 달빛은 금이 간 논바닥 사이로 숨어 버리고, 종갓집 마루에 켜놓은 전구는 장터의 선술집 아낙의 붉은 입술이 되어 헛헛한 가슴을 유혹하고, 마당에서 벌어지던 굿판인지 싸움판인지 가지각색의 광대들이 뒤섞인 채 목청을 돋우는 소리가 환청처럼 파고든다. 꿩깃을 꽂은 듯한 지주들이 싸우면서 삿대질하고, 하늘의 두려움 때문에 소를 살상한 백정은 미쳐 버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할미가 넋두리로 생을 마감하면, 그 사이를 틈타 묻어 들어온 잡신을 쫓아내던 그때의 광대들은 모두들 허허로이 떠나가고, 마을 초입에 있던 공동묘지 사잇길로 나를 닮은 아이가 힘없이 자전거를 끌고 넘어올 뿐 사위는 죽어있다.
-졸고, 「각시탈」전문
“이 작품은 유년의 고향집을 회상하면서 할머니를 중심으로 설화처럼 얽힌 이야기를 만연체로 풀어내고 있다. ‘장승, 성황당, 당방울, 서낭신, 각시탈, 종갓집, 광대, 백정’ 등에서 이 작품이 그리려는 시간과 장소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가 독자들의 시선을 잡기 마련이지만, 시인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기 위해 이러한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에 의하여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덧붙여진다. 시인에 의하여 재구성된 고향의 추억은, 그 이면에 시인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욕망의 본질은 바로 그리움이다. 왜냐하면 그 기억은 이제 사라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하여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혹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고향의 속성은 그 고향의 실제의 것이든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의 세계이든, 이러한 양면성을 갖는다. ‘소멸과 부재의 그리움’의 정서는 인간의 마음 아래쪽에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시인 정한용)
고향의 길목 영양에 접어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입간판입니다. ‘文香의 고장’ 영양군입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노래했고, 민족시인 오일도와 소설가 이문열이 작품으로 꽃을 피운 문학의 향기가 피어나는 고장, 그 중심에서 저 또한 불안하게 안개와 동거중입니다.
고향은 과거와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의 시간과 줄긋기를 통해 끈을 이어기고 있습니다. 이 끈은 이음만이 아니라 끊어짐일 수도 있기에 더욱 애절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무의식은 갈등과 긴장을 빚고 있습니다. 떠남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는 저는 시어의 고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애기집
자정이 임박해서야 귀갓길을 서두르는 이필구씨는 그의 십팔번인 ‘아빠의 청춘’을 흥얼거리며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양손에는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로봇들과 장난감들이 큼지막한 비닐봉지에 담긴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요즈음 같은 신세대들의 사고에 빗댄다면 고리타분한 구석기 시대의 유물 정도로나 치부될 뼈대 있는 가문의 장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들이 이룩해 놓은 명성과 권위에 비한다면 지금이야 완전히 몰락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동조할 줄 모르는 성품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렵게 공부한 말단 공무원의 반열에 끼인 것만 해도 그는 감지덕지였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주위의 친구들이 뒤질세라 앞 다퉈 수직상승을 위해 내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문중 어른들로부터 “저놈은 우리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놈”이라는 말과 함께 어느 곳엘 가든지 “우리 문중의 장손인데”라는 말로 일방적인 소개를 당하곤 했습니다.
그의 유년시절은 다른 아이들보다 사고나 언행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며 온실에서 자라듯 장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시절에 겪었던 묵시적인 억압은 곧바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어르신들에 대한 반발 심리로 변했으며, 그로 인해 매사에 소극적이고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습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애기를 가졌을 때만 하더라도 두 칸짜리 전세방 중 하나는 부모님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들 내외가 쓰면서도, 내 집 마련 주택부금이라도 하나 들자고 말을 꺼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월급은 모두 마누라가 관리하는데도 어디에 쓰이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매달 정해진 용돈을 받아 생활하면서도 전혀 불평이 없었고, 집과 직장 외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며 대인관계로 인해 누구나 겪었음 직한 외박 한 번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뜻 무미건조해 보이는 그런 단순하고 평범한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애기 낳고 한 번도 자식을 위해 손수 싸구려 장난감 하나 사주지 못한 것입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을 통해 색이 바래기도 하고 닳은 헌 장난감들을 마누라는 어디서 구했는지 잘도 들고 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 노릇을 못하는 것 같아 아이 대하기가 항상 죄스러웠는데, 새 장난감들을 양손에 잔뜩 들고 보니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술이 거나해진 만년 계장인 허만연씨가 ‘딸딸이 아빠’라고 놀림 받는 입사동기 김주팔씨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즈음 초음파 검사는 확률이 거의 백발백중이라던데.”
“아들은 아무나 낳는 것이 아니라구.”
좌석이 갑자기 떠들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한 마디씩 입을 벌리는 사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뚫고 나직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깔렸습니다. 이필구씨였습니다.
“걱정하시지 말라구요! 요즈음은 딸보다 아들이 많아서 사윗감을 고르고 골라 시집 보내게 될 테니까요!”
“나는 집에 들어가면 발 고린내가 진동을 친다구.”
마주앉은 동료 한 사람이 끼어들자, 이에 질세라 허만연씨가 큰 목소리로 말을 막고 나섰습니다.
“어이, 주팔이! 그러지 말고 생사고락을 같이 한 입사동기끼리 우리 사돈 맺을까?”
이미 주량을 초과하여 한계점에 도달했던 허만연씨는 주사가 심한 편이어서 동료들은 특별한 자리가 아니고는 함께 술 마시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평상시에는 성인군자 소리를 듣는 그였기에 ‘천사와 악마’라는 닉네임도 붙이고 다녔습니다.
김주팔씨는 그렇지 않아도 사십 줄에 들어서 귀하게 생긴 아이인지라 마누라가 낙심반 희망반으로 남편의 눈치 보랴 잔뜩 풀이 죽어 있어
“또 딸이면 어때. 셋째 딸은 안 보고도 업어 간다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아들이든 딸이든 튼튼한 아이만 쑤욱 낳으라고.”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왠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몇 주 전, 두 딸을 자연분만으로 낳았던 동네의 산부인과에 마누라를 데리고 가 초음파 검사를 했었습니다.
진찰실 밖에서 기다리던 김주팔씨는 병원 문을 나서기도 전에 마누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또 딸이래?”
마누라는 예스도 노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부모의 실망스런 표정을 애써 지우려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도, 한편으론 마누라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해산달이 되어 오늘 내일 하고 있지만 두렵고 불안하기는 마누라나 김주팔씨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도 그냥 빠져버릴까도 생각했었지만 동료들이 그를 위하여 마련한 회식 자리여서 대충 핑계대고 회피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다음 달에 승진하는 그를 위해 앞당겨 축하를 해주는 즐거운 자리였지만 집의 일이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축하주라고 돌아오는 술잔을 거부하지 못해 연거푸 받아먹은 술 때문에 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회식 자리에 오기 전 같이 걷던 동료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김주팔씨는 옆 건물에 있는 완구점에 들렀습니다.
“사내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것을 이것저것 싸주십시오.”
그는 대뜸 그렇게 말해놓곤 점원이 가지각색의 장난감들을 챙겨 담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점원이 내미는 비닐봉지를 얼른 받아 들고는 계산을 하자마자 누가 볼세라 잽싸게 상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회식집에 들어와서는 손에 든 그것을 카운터에 맡겨 놓았던 것입니다.
허만연씨는 얼르고 달래듯 농담들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는 사이 김주팔씨는 옆에 앉은 이필구씨에게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당신 첫 아들이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
“세 살인데요.”
“그럼 이 자리가 끝나면 카운터에 맡겨 둔 물건이 있는데 나갈 때 당신이 가지고 가지.”
“무슨 물건인데요?”
“그건 알 것 없고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아무 소리 말고 가져가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누라에게 장난감을 보여 주면서
“내가 누구냐.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일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구. 이것 보라구. 이렇게 사내놈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사왔잖아! 아무리 현대 문명이 발달했어도 그렇지 하느님도 모르는 일인데 그까짓 초음파가 뭘 안다구 그래? 두고 보라구. 분명히 고추 차고 나올 테니!”
하면서 잔뜩 호기를 부릴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사동기를 지 마누라라도 되는 듯 달고 사는 저놈의 입 때문에 틀어져 버린 불편한 심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딸만 낳은 내가 죄지, 하면서 무시했습니다.
다음날 집에서 온 전화를 받고 황급히 병원 간다고 뛰쳐나갔던 김주팔씨에게 이필구씨 찾는 연락이 온 것은 퇴근 시간이 십여 분 남아 있을 때 였습니다.
“이필구씨! 난데…”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들뜬 목소리는 분명히 김주팔씨였습니다.
“정말 미안한데, 어제 당신한테 준 내 선물 돌려줄 수 없겠어?”
“나… 있잖아…아들 낳았어!”
당황한 나머지 김주팔씨가 그만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 해버린 것이 빌미가 되어 그날 이후 김주팔씨에게도 닉네임이 하나 붙어버렸습니다. ‘새끼집’이라는...
사연인즉슨 벌써 두 번씩이나 딸을 받아서 건네준 산부인과 의사와 주팔씨 마누라가 초음파 검사 결과 아들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만에 하나 아닐 경우 엄청난 충격을 대비해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벌였던 것입니다.
물구나무서서 그림 바라보기
환상 그리고 그리움
한밤의 세찬 바람이 도시를 휘감고 지나간 뒤, 하늘은 이 도시 위에 하얗고 순결한 눈으로 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다시 매서운 바람은 도시를 짓밟기 시작합니다. 도시 한 귀퉁이에 곧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판잣집 한 채가 간신히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판잣집 어두운 한 구석에 옹색하기 짝이 없는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쿰쿰한 냄새가 배어 나오는 구석진 곳, 옷이라고는 다 떨어진 작업복 한 벌이 걸려 있는 옷장에선, 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구멍이 난 양말 두 쪽이 사이좋게 보란 듯이 엎드려 있고, 그 옆에 한 사람이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흐릿한 30촉짜리 전등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구원해줄 평화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죽음이 찾아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피어나면서 그의 두 눈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 그는 이 도시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젊은 시인이면서 화가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가슴을 아름다운 그림들과 심오한 단어들로 채우기 위해 이 세상에 등장했었습니다. 그는 세속의 비어 있는 정신에 안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이 도시에 나타난 한 줄기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가운 세상에 기쁜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려고 합니다. 이 차디찬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단 한 번도 미소를 받아보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홀로 누워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한 폭의 그림과 그가 가슴으로 써내려간 원고지에의 환상뿐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지막 힘을 다해 하늘 높이 손을 쳐들었습니다. 구름 장막에 가려져 있는 별을 보려는 듯 천장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이여! 나를 하얀 네 날개 밑에 보듬어다오! 사람들은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갑자기 도시는 침묵 속에 갇혀버렸고, 텅 비어버린 도시의 한 모퉁이 눈 덮인 도로 위로 낯선 노인네가 한 사람을 싣고 리어카를 끌며 이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눈 속의 평행선인 저 미혹의 타이어 자국!
만남 그리고 신비로움
예술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사물에 대한 이론보다도, 사상과 사상의 결합보다도, 개개의 사물보다도, 사물이라는 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예술가의 작품을 한 번 보고 그 느낌에 이끌려 자신이 모르는 사물에 대해서도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인현의 작품을 만난 것은 저에게 있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부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데 결정적인 인도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미학적입니다. 미의 법칙에 따라 물체를 만들어냅니다.
일상생활 중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리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장엄한 일출, 일몰, 출렁이는 파도, 황홀한 별자리, 미지의 수평선, 수려한 호수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감상합니다. 그러한 대자연 속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모방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에서 예술이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미적 체험을 찾아가는 것이 미학의 여정이며, 처음부터 미적 체험을 인정하지 않으면 미학은 불가능해집니다. 미학이란 하나의 별다른 예술적 언어에 대해 행해지는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미학은 곧 언어에 대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형이상학은 미학적 언어의 감화를 받을 수 있고 또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고 대립하고 있는 것이 타협으로 변형되지 않으며 다른 방법 속에서 자기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이 바라는 대로의 그 자신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인현의 작업은 바로 모를 깎고, 위치를 정하고, 그 위치를 극한적으로 밀어붙여 대립 항을 초월하는 제3의 출구를 구하는 칸트의 방법과도 일치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과 우주, 평면과 측면, 대립과 대칭, 바로 보기와 거꾸로 보기, 마주보기와 멀리 보기, 점과 점, 선과 선 그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끼는 인간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하나의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작품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구하는 사고의 모든 논리적인 측면을 우회해서라도 그 꼬불꼬불한 길을 더듬어야 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꼼꼼하지 못한 나로서는 한 작품을 이해하고 다른 사물의 느낌을 건질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하지만 그 시간적인 소비를 절약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마주보기에서 오는 필링입니다. 이인현의 작품세계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동생 이혁발의 끼가 내 몸 속 어딘가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나는 이인현의 작품들에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 나를 보고, 너를 보고, 우리의 일상을 보았고, 소우주 안에서의 운명적 윤회의 만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작가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괴테에게 있어서도 자연은 항상 그의 내면에 있었고, 인간과는 관계없는 독자가 비시각적인 면에 투영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릴 적 미술 시간의 기억에는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얀 여백에 물감을 짜서 반으로 접은 다음 손으로 문지른 후 펼쳐보던 데칼코마니였습니다. 지금도 가장 강력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설렘, 흥분, 신비로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형상, 동물의 형상, 자연의 형상들이 눈앞에 펼쳐지던, 그 신성스럽던 추억들……
이인현의 작품들은 설렘과 흥분됨으로 꽉 차 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 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언가 되돌린다는 것,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확인이며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 위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미지의 환상,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싶습니다.
안개 속에 묻혀 버린 깍새를 찾아서
도둑과 공해와 뱀이 없고, 바람과 향나무와 미인과 물과 돌이 많아 ‘삼무오다(三無五多)’로 불리는 울릉도를 처음 찾은 것은 일천구백팔십칠년 여름이었습니다.
강원남도로 불릴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인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저로서는 바다나 섬은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몸에 종기가 생겨 아버지 손을 잡고 동해바다를 따라 백암온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때 그 바다는 동화 속의 나라였습니다.
섬이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동경하듯이 저 자신도 유년시절 동화 속의 바다를 간직한 채 그 꿈을 이십 대 후반에 실현한 것입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저에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울릉도의 풍경을 소개해달라는 잡지사의 취재 청탁을 처음 받았습니다. 일주일간 머물 예정으로 포항에서 배를 탔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과 잡지사에서 건네준 경비를 보태 구입한 카메라와 배낭을 둘러메고 그동안 동경해왔던 사진작가의 흉내를 그럴듯하게 내면서 배에 올랐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갑판 위에서 수평선과 갈매기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도동항에 도착할 즈음, 노을이 어둠에 밀려 성인봉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시동을 건 오징어잡이 통통배들의 집어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들과 출항준비를 서두르는 어부들의 손놀림이 바빴습니다. 항구엔 배에서 토해낸 관광객들로 어수선했습니다.
저는 텐트 칠 자리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다 버스를 타고 사동을 거쳐 통구미에 다다를 즈음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바닷가는 전부 자갈들로 이루어져 할 수 없이 언덕 위에 텐트를 치고 다음날 취재에 나섰습니다.
먼저 성인봉에 올라 셔터를 수없이 누르고, 다음날엔 배를 타고 죽도를 갔다 온 다음 저동에 있는 촛대바위와 통구미의 사자암, 만물상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기사 쓸 내용을 수첩에 남겼습니다.
마지막 날 섬을 순회하는 순항선을 탔습니다. 안내원은 깍새섬은 구한말 때 울릉도 개척민들의 주식이 되기도 한 깍새들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전설적인 섬으로 남아 있는 그 섬을 끝으로 일주일간의 취재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다음날, 잡지사에 필름 두 통과 원고를 넘겨주고 몸에 붙어 있던 바다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잡지사 주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수화기를 들자말자 들려온 소리는 반말이었습니다.
“당신! 잡지사 문 닫는 꼴 보고 싶어 환장했어?”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거친 말투에 대꾸한번 못하고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편집주간의 마지막 말이 제 귓가에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습니다.
“필름엔 시커먼 바다만 보이는데, 당신 지금 장난치는거야!”
결국 저는 섬의 풍광에 취해, 필름을 제대로 끼우지 않은 채 사진작가의 똥폼만 잡고 셔터만 눌러댔던 것입다.
여름이 찾아오는 이맘때쯤이면 저는 허울뿐이었던 프리랜서라는 명함과 함께 안개 속에 묻혀버린 깍새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몸을 낮추고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며칠 전, 한국문학관협회 실무자 워크숍 때문에 서울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서울에 갔었지만 전혀 느끼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갈 때마다 지하철을 타고 일을 보곤 했었는데, 표 사는데 따른 불편함 빼고는 별 생각 없이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서울 지하철역에서 보고 느낀 것 중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표를 파는 사람이 다 사라졌다는 것과 '표 파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표 사는 곳'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표 살 때마다 표 파는 사람은 의자에 앉아있고, 표사는 사람은 서있고, 표 파는 사람은 마이크를 사용하고, 표 사는 사람은 벌집모양 뚫린 구멍으로 가는 목적지 역을 목이 터져라 외쳐야 했던 그때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서울 지하철 문화는 권위적이었으며,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이기적 문화였습니다. 지금은 사람중심의 문화며, 배려와 평등의 문화로 가치 중심이 '나'에서 '너'로 '너'에서 '우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색의 중심에는 인간으로써 가지는 원초적인 물음인 ‘나’를 포함한 ‘우리’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공통된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찾고자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핵심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 지하철의 변화된 모습 속엔 바로 문 ․ 사 ․ 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문학, 역사, 철학인 인문학이 세상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토대로 기업 가치를 사람 중심으로 창출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애플〉입니다. 애플은 인문학적 가치를 바탕으로 소비자 마음을 움직인 글로벌 기업입니다. 높은 이윤창출의 원동력이 기술에서 인문학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인문학적인 요소를 기술에 접목시켜 편하게 즐기게 함으로써 편리함에서 편안함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던 마이클 샌덜 교수의「정의란 무엇인가」란 인문학 서적이 백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현상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가치 중심이 사회현상에서 사람 중심으로 이동하고, 관념화된 것들이 사고전환을 통해 도덕적 잣대가 달라 질 수도 있다는데 독자들은 열광했던 것입니다.
이런 열기를 타고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는「인문학콘서트」가 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면서 인문학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다양한 채널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책이 주는 매력이란 책 속의 텍스트 속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과 소통하는 시간이 가장 큰 즐거움일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책에서 이야기한 글귀가 떠오릅니다. 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기성 시인들조차도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삽니다. 지금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는 시를 잘 쓰려면 ‘몸을 낮추고 바라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대상을 바라볼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거나, 어깨에 힘을 주고 바라봐선 절대로 좋은 시를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사물을 바라볼 때나, 상대방을 바라볼 때, 몸을 낮추면 깔본다는 고정 관념에 갇혀있습니다. 꽃을 바라볼 때 자세를 낮추고 보면 꽃술, 꽃잎, 색깔, 모양, 냄새, 움직임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면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
21세기의 가치 중심은 물질에서 행복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 잘사는 그런 사회가 아닌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상대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나눔의 문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 유명한 유마거사의 명언이 가슴을 치고 갑니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한 편만 더 소설을 쓰고 싶다!
새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을 다짐하면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덕담들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일주일쯤 지나면서 서서히 퇴색되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다시 다짐을 합니다. 아직 음력으론 새해가 되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설날을 기다립니다. 설날을 반기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새해 소망 중에 매년 제일 앞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순위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느 언론사에서 발표한 설문조사를 보면 매년 순위 첫 번 째에 올라가 있는 것이 건강이었습니다. 건강 중에 남성들이 가장 많이 소망하는 것이 금연입니다.
오늘도 출근한 후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이국장! 담배 어떡하면 끊을 수 있어?”였습니다. 저는 ‘담배’나 ‘금연’이란 단어만 들어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폐암 선고를 받고 금연 캠페인에 앞장섰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 "Don't smoke!"라고 외친 <왕과 나>의 주인공 ‘율 브리너’도 아닙니다. 올 7월 31일 4주기 기일을 맞는 소설가 이청준입니다.
선생님은 폐암으로 영면하시기 전 마지막 소설집『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출간했습니다. 이 소설집을 내면서 그는 “석양녘 장 보따리 거두는 심정으로 책을 꾸몄습니다. 소설을 더 욕심 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까 부끄럽습니다. 제목에 대해 부끄럽고, 이웃에 대해서도 부끄럽다”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소망은 “한 편만 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하고의 인연은 1991년 삼인행 출판사에서 기획한 인문학 총서 시리즈 중에 『이청준 론』을 출간 할 때입니다. 그 이후 『이문열 론』,『박완서 론』이 출간되기도 했지만, 맨 처음 출간된 『이청준 론』은 저에게 커다란 의미를 남겨 준 소중한 책입니다. 그 때 잠실 운동장 맞은 편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선생님 댁을 자주 방문했었습니다. 백발인 머릿결이 유난히 빛났으며, 말씀은 고저가 없이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음성이 차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한 번도 집 안에서 작별 인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문밖까지 나와 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대담 중에 늘 <피네스>라는 가늘고 긴 담배가 손가락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줄 담배를 피우고 계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도 호기심과 멋스러움을 과장한 채 그 담배를 즐겨 피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뒤 이청준 소설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주간! 이번에 제가 산문집을 내려고 하는데 지난번 책에 실린 대담한 글을 산문집에 실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전화를 끊고 난 뒤 기쁨과 부끄러움이 겹쳐져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허둥대기도 했었습니다. 당대의 대 작가로부터 그런 제의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담은 저와 선생님과 두 사람이 했기 때문에 수락의사를 받지 않고 실어도 법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산문집이 1994년 <월간에세이>출판사에서 출간된『사라진 밀실을 찾아서』입니다. 이 책 뒤 쪽에 대담 주제인「문학의 토양을 이룬 반성의 정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산문집으로는 1978년에 출간된 『작가의 작은 손』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산문집이 되어버린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는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2009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재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문단의 말석에 있던 저는 선생님과 가끔씩 문단 모임이나 행사에서 뵙고 술자리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한 날, 행사가 길어지자 저는 화장실을 찾아 담배를 물고 지루함을 연기로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가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 주간! 담배 끊어보게, 힘들겠지만 끊어야 되네...”
언제 오셨는지 선생님이 옆에 서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얼떨결에 대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애연가였던 선생님이 갑자기 그러시는 이유를 그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서 선생님이 폐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2008년 7월 31일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 올라가서 무릎 꿇고 말씀 드렸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원하시던 소설 한편을 더 쓰실 수 없다는 것이 원통할 뿐입니다! 부디 당신의 천국에 가셔서 원 없이 소설 쓰시면서 편히 쉬십시오. 전 선생님의 충고대로 담배 끊었습니다!”
2007년 음력 1월 2일,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한 달 후 첫 생신을 맞이한 날 전 담배를 끊었습니다.
제비 몰러 나간다!
어느 봄날, 툇마루에 누워 처마 위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일하러 나갔는지 부모님은 보이지 않고, 할 일없는 누렁이만 마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저를 염탐하듯 힐끔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꿈적도 하지 않고 처마 안쪽에 달린 밥사발만한 둥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엔 다섯 마리의 제비 새끼가 노란 입을 최대한 벌린 채 어미제비만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히 둥지 주변을 비행하던 어미제비의 입에는 잠자리 한 마리가 물려 있었습니다. 저의 최대 관심사는 어미제비가 다섯 마리 새끼에게 먹이를 골고루 나누어 주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미제비는 첫 번 째 새끼에게 먹이를 물려주곤 날렵한 꽁무니를 흔들며 날아갔습니다. 다음 번 먹이는 분명히 두 번째 새끼에게 줄 것인 지 아니면 또다시 첫 번째 새끼에게 줄 것인 지가 궁금했습니다. 그 순간의 떨림과 흥분이 저를 달뜨게 만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장을 해서인지 바지 안에선 방광이 요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찰나 제 눈 안에 포착된 것은 어미제비의 잘 빠진 꽁무니였습니다. 허공을 가르며 둥지 앞에서 먹이를 주려고 퍼덕이는 순간, 내심 저는 두 번째 새끼에게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낸 어미제비는 첫 번 째 새끼에게 보란 듯이 먹이를 물려주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얼마 후 어미제비가 저에게 남긴 배신감을 지울 수 없어 고민 끝에 어머님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제 얘길 듣고 난 후 어머님은 장난삼아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나도 너한테 떡 하나 더 주고 싶은데...”하시면서 엉덩이를 다독이셨습니다.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진달래처럼 붉게 타오릅니다.
지금은 제비가 환경요인으로 인해 지역마다 다르게 찾아오고 있지만 예전엔 음력 9월9일 중앙절에 강남으로 갔다가 3월3일 삼짇날에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수가 겹치는 날에 갔다가 수가 겹치는 날에 돌아오는 새라고 해서 조상들은 감각과 신경이 예민하고 총명한 영물로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은 길조인 제비가 날아오면 곳간을 열어 주기도하고 마당에 물을 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제비에게 나눔을 베푼 이유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는 제비의 영리함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작년 이맘때 쯤 저희 집에도 제비가 날아들었습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된장 숙성실 지붕 밑에 둥지를 트기 시작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제비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제비가 집에 둥지를 트는 것은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이라고 옆집 할매가 이야길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즈음엔 제비 개체수가 줄어들어 도시에선 아예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도 가끔씩 눈에 뜨일 정도입니다. 현재 제비가 천연기념물 후보로 올라가 있는 원인은 사람들이 뿌린 농약이 제비의 몸에 쌓여 알 껍질이 얇아지면서 부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제비가 제 집에 둥지를 틀었으니 얼마나 황홀했던지 아침 저녁으로 확인하고 관심을 쏟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둥지에 앉아 있어야 할 제비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제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비가 사라진 원인을 알 수가 없어 고민 끝에 인터넷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제비는 민감하여 밤에 잠을 잘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참지를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원인 제공을 한 주범은 다름 아닌 저희 집 아이였습니다.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고 밤만 되면 제비집 밑에서 줄넘기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아픔을 안고 떠나간 그 제비를 잊지 못한 채 돌아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비가 공들여 만들었던 둥지도 떨어져나가 흔적만 남아있는 그곳에 받침대를 달아놓고 기다립니다.
오래전 ‘제비 몰러 나간다’는 광고 CF가 입소문을 통해 유행처럼 번지던 그 때가 생각납니다. 흥부전의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의 사연을 듣고 집에 돌아와서 자기 집 처마 밑에 제비집을 지어놓고 제비가 오기만을 빌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자 놀부가 직접 제비를 몰러 나간다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흥부전에 등장하는 제비를 상징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갚는 제비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받는 제비입니다. 은혜를 갚는 제비는 하늘의 심부름꾼을 뜻하고, 구원을 받는 제비는 지친 몸을 의지할 곳을 찾아다니는 힘없는 민중으로 상징되기도 합니다.
작년에 강남으로 간 제비들이 돌아 올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번에 돌아 올 때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민중들에게 구원을 받는 제비로 찾아와 따뜻하고 포근한 삶의 희망을 안겨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저는 제비 몰러 나갑니다.
느낌이 가져다 준 신바람
얼마 전의 일입니다. 취재차 수원으로 가고 있는데 차가 막혀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창밖으로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아파트 공사장 길 옆 구석에 핀 이름 모를 풀꽃! 그 풀꽃은 석양의 노을을 받아 더욱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불도저가 휩쓸고 간 흙더미 한 켠에 서 있는 그 풀꽃들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우울해 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인 병리현상 중의 하나인 이기주의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만은 아닌듯합니다.
도시에 살면서 고향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리움! 그것은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고픈 회귀본능일 것입니다.
탐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를 피울 줄도 모르는 풀꽃도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편리함에 거부를 하지 못하고 댐을 건설합니다. 조상대대로 물려준 정든 고향 산천이 하루아침에 수몰되어 버리듯 언젠가는 아스팔트 속에 묻혀 버릴 그 풀꽃의 여운은 강렬했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느낌! 그것은 현대인에겐 신선하고 청량한 윤활유 역할을 하는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개구리의 이솝우화를 애기하지 않더라도 이 거대한 도시 속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수원성을 지날 때 쯤 이번 취재의 인물이 격변기 때의 역사적 산증인이기 대문인지 도로에서의 짜증스러웠던 기억보다는 설레임이 먼저였습니다.]
사야 송시백 옹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짙게 깔려 놀이터엔 아이들이 놀다가 버리고 간 과자봉지만 가로등에 번쩍일 뿐 아파트는 거대한 침묵의 덩어리였습니다.
송옹은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3.1 만세운동으로 확산된 학생운동 6.10만세 사건 때(보성 고보 일학년 재학 중) 전 학생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안암동 로터리에서 자주 독립 만세를 외치다 투옥된 분입니다. 그 이후 학생운동의 지하조직 써클인 '독서회'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 러시아 혁명이후 들어온 사회주의 이념인 막스 레닌주의에 심취하여 결국 공산주의로 일생을 바친 분이십니다.
지금까지도 그 이념 때문에 숨어 지내시면서 83세라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이나 자본론을 읽고 계시는 것은 우리 민족의 가야할 길을 책에서 찾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9평짜리 아파트에 홀로 기거하면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준비를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 민족 장래에 대하여 아낌없는 조언과 정신을 심어주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제가 봐온 어느 사람들보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취재 중 몇 번씩 되풀이한 말씀 중에도 그의 정신이 엿보였습니다.
"이형! 공부하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우리 한민족은 반드시 세계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렸을 적 어머님의 회초리에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던 '공부해라'는 소리에 대하여 항변이나 반발심으로 그 반응을 표출해 보였고, 그때까지도 공부에 대한 개념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고 있던 나에게 따끔한 충격이었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혁명가다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송옹은 방안에서도 검버섯이 핀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십니다. 겉으로 풍기는 인상은 강인한 의지로 뭉쳐져 시대의 역경을 헤쳐 온 기개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씀하실 때마다 어김없이 소리 없는 울음,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의 울음을 흐느끼실 땐 취재고 뭐고 벌떡 일어서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도 나는 그 울음이 던져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이 분에게 그런 울음을 울게 하였는가? 그 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 시절을 체험하지 않은 나로선 그 울음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형! 일제시대 때 제가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일 겁니다. 숙부님 손을 잡고 조상님이 묻힌 선산에 참배하러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숙부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땐 제가 어떤 질문을 숙부님에게 한 것 같은데 그 질문은 생각이 나질 않고 단지 숙부님의 대답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먹어 버렸단다.' 그땐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지요. 그러나 그분이 남긴 말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의구심만 불러주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먹었지? 이 의문의 느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송옹은 어릴 적 숙부님이 하신 그 말의 느낌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고뇌하고 의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죽음을 무릅쓰고 6.10 만세사건의 선봉에 서서 자주 독립 만세를 외치게 했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송옹이 숙부님이 하신 그 말을 무심히 지나쳤거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 의문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에 민족의 장래와 평생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굳게 지킬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물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활도 달라지고 사고도 변해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으며 알고 살아야 할 것을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획일화되어가고만 있는 이 사회에, 물질이 가져다 준 안락에 빠져 허둥대고 돈 쓰는 맛에 취해 헤어나질 못하는 현실이 돛대 없는 항로를 가는 것 같은 서글픔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 신문 문화면에 기사화된 독서계의 풍토에 대한 기사를 읽고 "과소비가 독서계에 불어 닥친다면 '망국론'이란 무섭고 엄청난 말은 나오질 않았을 것이다"라는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억지웃음을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는 어느 기관지의 설문조사를 토대로 하여 국민들의 독서경향에 대해 밝힌 기사였습니다.
일 년에 책 한권 읽지 않는 국민이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다는 것과, 밤새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고뇌하고 슬퍼하고 느낄 수 있는 책을 회피하고 어려운 책보다는 쉽게쉽게 읽히고 재미있고 쇼킹한 책들만 선호하는 독자들의 독서 경향에 대해 일침을 가한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는 단재 선생의 명언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송옹이 나에게 간절하게 바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공부하시오"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팔십이 넘으신 송옹 자신도 책을 놓지 않고 새로운 탐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낄 줄 아는 자만이 생을 보다 더 진지하게, 풍요롭게, 진솔하게 살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느낌은 직접체험이든 간접체험이든 현실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근원이 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초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아픔을 현실에 승화시킬 줄 아는 슬기로움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원의 행복
지난달 와룡면 가매기 마을에 사는 동생 집에 어머님을 모시고 식구들과 함께 딸기를 따러 간적이 있었습니다. 매년 유월이 되면 동생이 사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 전체가 딸기 향으로 진동을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딸기 재배 방법을 물을 정도로 동생은 딸기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배후엔 어머님의 간곡한 조언과 땀이 배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서산의 노을이 소나무를 품은 채 지는 것이 아쉬운 듯 붉은 빛을 더욱더 뿜어내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릴 때입니다. 모두들 처마 밑 평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시작할 무렵입니다. 어머님이 갑자기 지갑을 꺼내시더니 만원을 저에게 주시면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어린이날에 한번도 못 챙겨줘서 미안했는데 이것으로 끝내자 알았지?”
순간적으로 어머님의 속마음을 헤아리기도 전에 저는 당황해서 말을 건넸습니다.
“아니, 어머니! 오늘은 어린이날도 아니고 벌써 내 나이가 오십 중반인데 무슨...”
웃으면서 만원을 받아든 두 손이 부끄러워 내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엔 동생 그리고 집사람과 손자 손녀들에게도 똑같이 만원을 주었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그 순간을 인증샷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시골에서의 유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어린이날에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이나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기억은 저에겐 하루하루가 어린이날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뒤안으로 갔습니다. 그곳엔 어머님이 식구들 몰래 만들어 놓은 조그만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두컴컴한 그곳엔 제가 좋아하는 먹을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누나도 몰랐고 동생도 몰랐던 그 항아리는 어머님이 만들어놓은 비밀스런 요술항아리였습니다.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떨림과 설레임이 교차합니다.
지금도 고향집터엔 큰 감나무 한그루가 저를 기다리며 서 있습니다. 어릴적 아버님은 고욤나무가 감나무로 변신하는 것을 저에게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접을 부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술 손으로 인해 고욤나무가 감나무로 변해가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만원을 어떻게 해야할지 행복한 고민 중에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아버님의 책상에 놓여있던 한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필사를 하시던 그 책이었습니다. 그 책 속에 유독 밑줄 친 부분이 눈에 띠어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 어느날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하루는 몹시 울며 슬퍼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공자는 '그대가 상을 당한 듯한데, 다른 사람보다 유달리 슬프게 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곡을 하던 사람은 자신이 우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었을 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에 공자는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樹欲靜而風不止),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시니(子欲養而親不待)’ 효도 할 생각으로 찾아가도 뵈올 수 없는 것이 부모인 것입니다.”
감나무가 베어 지고 난 뒤의 뒤 늦은 존재감처럼 밑줄 친 부분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한 하루였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립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문학관에서 근무하면서 처음 봤던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던진 첫마디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상실에서 해설을 마치고 난 뒤 육사 선생의 영상을 틀어주었습니다. 막이 올라가고 난 뒤 관람객들 중에 한 사람이 나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왜 저렇게 우실까?’하는 궁금증이 생겨 그 사람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시는지?...”
그 사람은 서슴없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보니 어느 대학교의 법대교수였습니다. 그때서야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습니다. 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동안 육사 선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을 겁니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지식만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영상을 통해 육사 선생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에 감정이 북받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감성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부끄러움의 눈물을 보면서 저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기억이 그립습니다. 요즈음 사회 병리 현상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입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타인에게 저지르는 살인이나 폭력,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왕따’ 현상이나,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 정치권의 대립과 분열, 권력형 비리, 도덕적 상실감은 서로가 자기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타협이 있을 리 없고, 치고받고 또 당하고 보복하는 악순환만 되풀이 될 뿐입니다.
옛말에 “부끄러움은 모든 도덕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도덕적 정서입니다. 이것을 부끄러움이라는 감성으로 떠 올리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 마음이 움직이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결핍을 결핍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충족시키고자하는 노력의 시작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옳고 그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할 정도로 부끄러움의 기능이 상실된 사람들입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인자함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이고, 공경하는 마음은 예를 표하는 것이며, 시비를 따지는 마음은 지혜로움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은 누구나 타고나는 의로움의 감정이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을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지만,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싸운다고 해서 그 힘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없애려거나 무시해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잘못한 일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미덕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이 감정을 가꾸고 관리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로 잡아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지금 해야 할 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오는가?
오래전의 일입니다.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책 한 권이 책상 모서리에 반쯤 걸쳐져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고, 그 책 위에 양파가 놓여 있고, 또 그 위에 숟가락이 놓여 있었습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처럼 불안한 모습의 작품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의 테마가 바로 '불안'이었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작가는 "녹차가 가득 찬 컵이 책상 모서리에 걸쳐 있는 작품이 있는데, 균형을 잡고 있어서 컵 속의 녹차는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작은 충격에도 균형을 잃고 물은 책상 아래로 쏟아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처럼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번 작품으로 표현했으며, 우리가 꿈꾸고 원하는 성공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사회는 오직 한 가지 경제적 성공에만 가치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그런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술가는 이 시대의 불안이 '다양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성공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크게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만큼 부나 명예를 쌓지 못해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불안 심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불안은 연쇄적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젊은 층은 실업과 결혼을 고민하고, 이들의 부모들은 노후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직을 걱정하는 위기에 몰려있습니다. 앞날이 불투명하므로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불안이 청년, 중년, 장년, 노년에 걸쳐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 공약 발표 당시 글로벌 시대를 맞아 보다 준비된 국정운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을 강조하면서 대한민국의 변화와 혁신을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행복이란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을 때 심오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부자나라가 아니고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나라가 아니어도, 복지나 부의 분배를 논할 나라가 아니어도,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부탄이란 나라도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행복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듯 의문점과 동시에 지금도 행복을 꿈꾸며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잘 사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하다 것이 오늘날의 통념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과거의 믿음보다 현대적이기 때문에 보다 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오늘날의 문화 코드 역시 비과학적이며 직조된 문화적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어리석은 통념에 지배당한 사례가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전문가들의 조언은 장수나 생산성 경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전문가들의 조언을 거부하면 다른 종류의 행복에 적합한 긍정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행복에 대한 해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현실이나 주변 상황이 아무 문제가 없으면 행복하다고 말을 하시는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행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럴까요? 생활이 안정되어 있고, 가정도 평안하고, 직장도 잘 다니고 있고, 문제라는 것이 없는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면 행복이라고 하는데 자신에게는 기쁨이 빠져있어 그렇다고 생각하는 삶도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환경이 자신에게 삶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자발적인 감정이 동요되어 설레이는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삶에서 설레이는 일은 가슴이 뛰는 것,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 수 있는 것을 느꼈을 때 행복감이 스며듭니다.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 같은 삶이 커다란 기쁨을 주진 못하지만 작은 것에서도 행복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의 국민행복시대가 아닌 진정한 삶의 진실에서 다가오는 발 밑바닥에서 꿈틀대며 찾아오는 그런 행복시대를 꿈꿔봅니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살아 있음은 아름답다
올 봄의 전령사도 어김없이 남쪽에서부터 봄바람을 타고 올라 온 봄꽃이었습니다. 창밖을 달리는 강변 바깥 풍경은 곡우가 멀지않았음을 아는지 벚꽃들이 분분히 낙화의 유희를 즐기고 있습니다. 담장이나 도로가엔 개나리와 목련이 도토리 키 재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나른한 봄날입니다. 라디오에서 뉴스속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오늘 따라 경직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봄바람은 꽃과 함께 우리들 곁에 있지만 북쪽에서 불기 시작한 전쟁바람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봄날이기도 합니다.
이 순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역사에 회자될 고 권정생 작가의 유언이 떠올랐습니다. 라디오에선 계속해서 여자 아나운서가 ‘북한 도발‘에 대한 멘트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얼마나 전쟁이 참혹했기에 환생까지 포기할 정도로 유언장에 기록을 했을까 하는 떨림에 기억을 애써 지우는 사이 차는 도립 안동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올 해로 도서관 주부독서회 회원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지도 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강의는 고 박완서 소설가의 대표적인 소설 <엄마의 말뚝>을 낭독하고 작품 분석과 품평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황해도 개풍 출신인 그녀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소재를 통해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분단사의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여성작가였습니다. 이년 전 팔십 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오늘도 지난 강의 때 나타났던 그 상황이 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빨리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지난 시간엔 고 이청준 소설가의 <눈길>을 낭독하다 터졌던 일이었습니다.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눈길을 걸으며 아들의 작은 발자국마다 눈물을 뿌리며 아들 잘 되기를 기도하는 어미의 마음...마을 어귀에서 울면서 시린 눈으로 비쳐드는 아침햇살이 부끄러워 동네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어미의 애틋함을 표현한 문장에서 울음이 터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상했던 대로 낭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울컥하더니 낭독이 멈춰버렸습니다. 그 이후엔 이어졌다간 멈춰지고 멈춰졌다간 이어지는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나 죽거던 내가 느이 오래비한테 해준 것처럼 해 다오. 누가 뭐래도 그렇게 해다오.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기에 부탁하는 거다."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권총으로 사살된 오빠가 죽고 난 뒤 어머니는 아들을 화장한 후 북쪽을 향해 자신이 직접 유골을 뿌렸습니다. 그 짓을 당신이 죽으면 딸에게 오빠처럼 해 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내용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강의를 하던 저도 감정을 애써 감추느라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6· 25 전쟁으로 인해 이산된 한 가족이 겪은 비극을 통해 작품으로 분출되고 있는 슬픔의 공감이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육십년이 지난 분단의 비극은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작가는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정신 착란 속에서 그 역사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겨우 낭독이 끝나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품평이 이어졌지만 강의가 제대로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뒤풀이 식사 자리에서 이구동성은 ‘꼭 설명해야 됩니까?’였습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튼튼한 말뚝을 박기 위해 모질게 살아온 어머니의 한이 자신들의 어머니였으며, 그들은 그 어머니의 딸들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대물림이 되어 눈물 흘리는 역사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딸들의 눈물에서 볼 수 있었던 잊지 못할 봄날이었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나 아닌 것이 없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숲길이나 들길을 걸어 보십시오. 뜀박질하면 나 자신만 보이고, 걷다가 서면 자연의 소리가 들립니다. 서 있다가 앉으면 작은 우주가 들려주는 소곤거림에 벅찬 감동이 밀려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이런 문구를 접하면서 꿈을 꿉니다. 고향이나 시골을 동경의 대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기도 합니다. 전원생활을 그리워하고 귀농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연과 가까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이런 주제는 사람과 자연이 교감할 수 있는 친환경 기업 이미지 카피로도 등장합니다.
이제 힐링은 도시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로서 자연 치유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작용하고 있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친환경적인 분야에 더욱더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옛말에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은 근본을 가지고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은 나와 한 몸(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천지와 나는 같은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것이 ‘나 아닌 것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뜻입니다. 사람과 자연을 일심동체로 본 옛 말을 다시한번 상기시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은 말없이 늘 우리 옆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자연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먹고, 먹히며, 톱니바퀴 돌 듯 돌아가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생명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빈틈없는 생존전략의 결과입니다.
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실 생태계 문제는 먹고 먹히는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먹이며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만물은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물의 고통을 느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을 먹이고 병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을 먹을 수 없다는 논의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몸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먹이고 치료해 주거나, 사랑을 나누는 상생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올 봄에도 저희 집을 제일 먼저 방문한 손님이 거미입니다. 방안이나 밖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거미입니다.
“방안에 사는 거미들은 아침 일찍 기어 나오면 그 집에서는 그날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고 기뻐한 것은 우리 고장의 풍속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 누가 여행을 했을 때나 객지에 있을 때면 늘 아침 거미가 기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제법 장성할 때야 알았습니다.”
육사 선생의 수필에 나오는 거미에 대한 일화 한 토막입니다. 유년시절 저의 어머니에게도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가면 딱정벌레, 사슴벌레, 무당벌레, 애호랑나비, 꽃하늘소, 바구미, 큰 흰줄나비들이 유채꽃, 영산홍, 석류꽃, 라일락꽃, 산수유, 철쭉꽃 주변에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합니다.
많은 곤충들은 평생 동안 특정 식물만을 찾아 먹는다고 합니다. 잎 살만 먹는 녀석, 즙만 먹는 녀석, 썩은 나무만 먹는 녀석, 꽃가루나 굴만 먹는 녀석, 각자 좋아하는 부위만 선택해서 먹습니다. 만일 모든 종류의 곤충이 모든 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면, 식물은 사라질 수도 있고, 식물을 먹는 곤충 또한 먹이가 바닥나 연쇄적으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곤충들은 식물 먹이를 정해놓고 각자의 입맛에 맞게 부위를 달리해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도 살고, 곤충도 식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곤충들의 지혜가 존경스럽고 위대할 뿐입니다.
생존본능인 풀 한 포기에서 일어나는 곤충의 인생 역정은 사람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다를 바 없습니다. 대를 잇기 위해 배우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성장하기 위해 억척스럽게 먹고, 거친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생존전략을 세우는 등 그들의 한 살이는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지 않은 길>입니다. 이 시에 감동을 받아 사람들이 자주 가는 길이 아닌 낯선 길을 선택한 어느 곤충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사랑하고 지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름밤을 아름답게 비행하던 반딧불이었습니다.
“반딧불을 보면서 별도 아닌 곤충이 왜 별똥을 쌀까? 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빛이 어느 부분에서 새어 나올까? 불빛에 연한 몸이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도대체 불빛은 왜 내는 것일까? 불빛을 내는 연료는 무엇일까? 그 연료가 다 닳아 없어지면 죽게 되는 것일까? 그들끼리는 불빛으로 대화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그는 호기심 가득한 반딧불의 수수께끼들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 궁금증이 꿈이 되었고, 결국 그 꿈을 이루어낸 그는 유명한 곤충학자가 되었습니다.
빌벵이 언덕에서 울러 퍼지는 말똥굴레 노래
민들레의 토박이말은 ‘말똥굴레’입니다. ‘정감이 가는 권정생 동화 <강아지똥>은 한국 아동문학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를 받게 된 강아지 똥이 슬픔과 외로움을 삭이면서 겨울을 나고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민들레꽃으로 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보다 더 그윽하고 구수한 향기를 맛볼 수 있는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만한 격조 높은 동화’라는 것에 대해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벌써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린이 책을 만드는 출판사 편집장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었습니다. 안동에 계시는 권정생 선생님 댁을 방문해야 되는데 함께 동행해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제 고향을 안동으로 알고 있던 출판사 사장의 제안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습니다. 편집장 차를 타고 안동 일직면 조탑리로 내려갔습니다. ‘서러운 꽃, 그리운 꽃, 그래서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꽃’이라고 노래한 진달래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따스한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보물 57호로 지정된 5층 전탑인 조탑 부근에 차를 세워놓고 골목길을 돌아 볼품없는 흙집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고 찾아가서인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야트막한 처마에 앉아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쭈뼛거리자, 그는 “방이 좁아 미안하다”는 말과 동시에 주변의 책들과 이불을 대충 치웠습니다. 그 뒤에야 무릎을 맞대고 세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하는데...” 하면서 일어서더니 양푼에다 강냉이 튀밥을 담아 왔습니다. 그리곤 출판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고, 요즈음 미디어에 노출된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과 심려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그날, 그의 꾸밈없는 맑은 마음과 아이들에게 온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는 1983년 이 마을 빌배산 야트막한 빌뱅이 언덕 밑에 오두막을 짓고, 여기서 2007년 5월 17일 작고할 때 까지 살았습니다. “저는 올해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빌배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공지가 있어 두 칸짜리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무척 따뜻합니다. 언덕배기이고 그리고 풀밭 가운데이기 때문에, 집 둘레에 사계절 꽃들이 피고, 가을엔 냇가고 산기슭이고 가리지 않고 들국화가 꽃밭처럼 피어납니다. 요사이는 안개가 끼고 그리고 해가 뜨면 그 안개 사이로 나타나는 산국화 꽃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연보라의 쓸쓸한 빛깔이 후미진 골짜기 기슭으로 무덕무덕 피어 있는 모습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가슴 설레 듯 자신이 직접 지은 흙집과 주변에 피어있던 꽃들을 생각하면서 그가 말한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는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됩니다.
권정생은 안동군 일직면 조탑리 일직교회 종지기로 문간방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67년이었습니다. “겨울의 새벽하늘은 참 아름답다. 종을 치면서 나는 줄곧 이 아름다운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성에가 끼고 꼬장꼬장 얼어 버린 종 줄을 잡은 손이 무척 시리지만, 나는 장갑을 끼지 않습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역시 맨손으로 종 줄을 잡고 쳐야만 서툴지 않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한 번 한 번 종 줄을 잡아당기는데 정성이 가기 마련입니다.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울려 더없이 성스럽게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때의 시절을 회고한 그의 산문을 읽다 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 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 들어와 꽥꽥 울었습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습니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의 모습과 태도는 성자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시 <밭 한 뙈기>에서도 그의 생명과 평화에 사랑,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이 평등 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밭 한 뙈기/논 한 뙈기/그걸 모두/'내' 거라고 말한다//이 세상/온 우주 모든 것이/한 사람의/'내' 것은 없다//하나님도/'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이 세상/모든 것은/모두의 것이다//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다람쥐의 것도 되고/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밭 한 뙈기/돌멩이 하나라도/그건 '내' 것이 아니다/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그가 막바지 죽음을 의식하면서 마지막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모든 삶이 응축되어 있는 유언은 다시 읽어 봐도 죽비처럼 온몸을 파고듭니다. "끝입니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습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습니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환생을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됩니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입니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습니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요.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입니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봅니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랍니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합니다. 2005년 5월 10일 쓴 사람 권정생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
뉴스를 보다가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었던 그가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해당 교육청이 학교법인에 파면조치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시를 통해 독자와 삶의 깊이를 공유하는 이 시대의 시인들은 기본적인 덕목과 도덕적인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이 사회의 통념입니다. 시인들은 시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위로를 삼고 시인으로서 일생을 영위해 갑니다. 시인으로 산다는 건 시인의 권리이자 당당함이지만 그 안엔 도덕적인 의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살아가려 애를 씁니다. 시가 있다는 존재만으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뉴스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트위터에 올라 온 글들입니다. “시심을 더럽히는 시인이란 자들! 말장난으로 대중을 속여 시인이란 타이틀을 달고...인간의 명예를 더럽히고”있다.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A양을 격려하기 위해 뽀뽀를 두세 차례 했다며,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는데, 격려를 왜 뽀뽀로 하니!” 란 댓글들이 쉴 새 없이 올라왔습니다.
시인이란 유일하게 사람인(人)자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설가, 수필가, 작가 중에서 오직 인간이어야 하는 자가 시인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시로서 이야기하고,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줄 아는 그런 눈을 가져야 하고, 사물의 존재를 들추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도 시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어떤 타협에도 줏대와 진실성이 있어야 하며, 누군가의 눈치를 의식해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며, 전율로 통과되지 않는 시는 태워 버려야 하는 것이 시인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 자신도 시인으로서 정도(正道)를 걷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기위해 시인이기를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달랠 뿐입니다. 올해로 문단에 등단한 지 이십년이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던 날이 떠오릅니다. 문단에 머리를 처음 올리던 날,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제가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꽃다발과 선물을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았던 적이 기억납니다. 그날을 잊고 싶지만 저에겐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존경하던 대 선배인 김춘수, 김종길, 김남조 시인들 앞에서 문예지 주간인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죽비 같은 말이 가슴에 아직도 남아 맴돌고 있습니다.
“시인은 절대로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며, 글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하며,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이름을 먼저 앞세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큰 업적은 남길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을 거짓으로 위장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 능력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뛰는 사람은 뜨거운 열정은 있을 수 있지만, 가슴은 경직되기 쉽습니다. 상담자의 옷을 입으면 상대의 문제를 같이 나눌 수는 있지만, 상대를 살리고서 자신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실패를 해도, 상처를 받아도, 맑은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옷을 입고 살 때에는 아픔을 학대해야 하지만, 시를 쓰는 순간은 아픔의 친구에게 귀한 언어의 옷을 지어줄 수도 있습니다.
고은 시인에게 시를 왜 쓰냐고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의 답도 시는 누구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우애(友愛)를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일반적 우정이 아닌, 하나의 사유 체계로 개념화한 의미로서 말입니다. 옛날에 문학은 교사 역할을 했지만 난 그저 누구의 친구, 진실과 비애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시인은 타인의 가슴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이란 세 살 때부터 남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他者)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이렇듯 시인의 길은 타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시어로서 치유해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때론 친구가 되고, 누이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모가 되어 시어로서 사랑을 나누어 주는 언어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선 자신의 욕망부터 버려야 합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우(偶)를 범하는 시인이 이 시대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길 바랍니다. 누군가 “아이보다 훌륭한 시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 같은 시선을 가진 시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그 길을 꿈꿔 봅니다.
삼인행 <작가연구>-이청준론 – 대담 이위발
문학의 토양을 이룬 반성의 정신
잠실야구장 건너편에 자리 잡은 선수촌아파트, 지난 6월 18일 이청준 소설가의 집을 찾아간 것은 그와의 대담을 위한 네 번째 방문이었다.
초행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던 것은 찌는 듯이 더운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작가 연구’를 부제로 한<이문열론(論)>을 출간하고 난 후 주변의 여러분들로부터 격려와 충고를 받은 뒤였기에 두려움과 설렘이 앞섰던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대담이 좀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내 나름대로의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대담은 더욱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청준 소설가의 작품을 내가 처음 대한 것은 정치적 공백기였던 80년대 여름, 카프카나 랭보에 빠져 밤낮없이 학교 앞 술집을 드나들던 무렵이었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난 뒤 나는 도저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식에 사로잡혀 소주병을 들고 남산에 올라가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이 책(이청준론)을 엮기 위해 자료 수집 차 이청준 소설가의 댁을 방문했을 때의 첫인상은, 작품을 읽고 난 뒤 그 작가를 만났을 때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주는 여느 작가하고는 크게 달랐다.
이지적인 면모에 차분한 성품, 그리고 하얀 머리칼은 자못 신선 같은 분위기마저 자아내기도 하였다.
벨이 울리자 이청준 소설가가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지금까지 네 차례의 만남에서 약속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음).
잡지사와 출판사 생활을 해오면서 유명세나 지명도가 높을수록 약속에 대한 개념을 쉽게 무시해버리는 이들을 숱하게 봐 온 나로서는 적잖은 당황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의 환한 웃음을 받으면서 거실에 앉아 미리 준비해 간 메모지를 뒤적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어제저녁에 과음을 해서, 잘 될지 모르겠소. 딱딱한 얘기보다는 쉽게쉽게 이야기 합시다.” 고향말투와 서울 말씨가 섞인 채로 들려오는 이청준 소설가의 독특한 억양은 일면 따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향을 등진 채 콘크리트에 묻혀 살고 있는 현대인의 아픔 같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부인이 손수 끓여주는 정성이 담긴 차를 마시면서 긴 시간(쉬는 시간 없이 6시간)동안을 진지하게 나눈 대담 내용을 여기에 정리 수록한다.
이태동의 <부조리 현상과 인간의식의 진화>에서 보면 선생님의 작품(<소문의 벽·언어사회학 서설 1~3>)은 소설이라기보다 자신의 문학관을 밝힌 백서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우선 그 작품들에서 몇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문학행위는 크게 보아, 보다 넓은 인간의 삶의 영토를 획득하고, 이미 획득한 영토에 대해서는 이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되풀이 확인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유의 질서로써 독자를 지배하고 싶어한다…….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문 열어 보인 그 자유의 질서에 의해 독자들의 삶을 보다 넓고 자유로운 세계에로 해방시킴으로써 그 자신도 그의 지배욕과 복수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삶의 모든 욕망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의 삶을 보다 깊이 사랑하고 보다 넓게 실현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한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욕망과 그의 독자에 대한 책임 사이의 배반 없는 상호 창조 관계가 성립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의 것은 <소문의 벽> 주인공 박준의 문학에 대한 자기이해의 인용이고, 뒤의 것은 <지배와 해방>의 이정훈이 작가의 문학 동기나 태도들에 대해 자기견해를 밝힌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두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소설관이나 문학에 대한 태도들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학은 결국 누구의 말처럼 보다 더 자유로운 화창한 삶, 행복한 삶과 세계에 대한 꿈이요, 그 싸움의 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태동은 위의 작가론에서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하위(下位)의 리얼리즘을 파괴하고 상징적 요소를 곁들인 상위(上位)의 리얼리즘을 독특한 소설형식 속에 성공적으로 구축시킨 유일한 한국 소설가”로 지칭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작품은 표면적인 현실을 초월해서 개체 가운데 있는 보편적인 인간영혼의 모든 심층을 묘사하고자 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완전한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선의 덩어리도 아니요, 순전히 악의 덩어리만도 아니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밝은 하늘을 향한 신성(神性)과 온갖 더러운 욕망과 죄악에 이끌리는 어두운 마성(魔性)을 함께 가진 양면성 혹은 복합성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 인간을 도덕적 당위성이나 소설기술상의 편의에 따라 선의 상(像)처럼 혹은 악의 전범처럼 단순시선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그 본성을 그 현상(現像) 그대로 보아주는 총체적인 인식의 눈길이 필요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과 삶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실적 이해 위에 소설을 시작해야 한다는 작가의 정직성이라는 것으로 이어질 문제이겠습니다. 다만, 아까의 언급은 아마 저의 그러한 태도와 관련이 있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을 흔히 ‘지적(知的)작가’(김윤식의 <감동에 이르는 길>)라 부르는데 이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설이나 문학은 우리 삶이나 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작업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지적인 사유와 대응이 필요한 문화행위입니다. 그것이 소설의 질서 속에 잘 융화되지 못하고 무슨 현학성 같은 것으로 떠도는 것은 바람직스럽지가 못한 일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금물’과 ‘전짓불’, 눈[雪] 등의 단어들에서 선생님이 의도한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전짓불’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폭력이나 강제· 강압적인 요소로 해석할 수 있고, ‘소금물’은 어떤 욕구에 대한 최소한의 충족을 말합니다. ‘눈’은 원죄의식과 같은 자기부끄러움을 비춰주는 순결성, 혹은 사랑의 꿈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카프카나 조이스가 보여준 심층적으로 구성한 닫힌 소설이 아닌 열린 소설로서의 고도의 지적 방법을 사용하고 계신 선생님의 작품 구성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열린 소설이란 한마디로 갈등의 해결점이 작가로부터 제시, 완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문제로 남겨지는 형식의 소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작가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독자를 오히려 문제의 숲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질문 대행업자 역할을 하는 쪽이 되겠고요. 좋게 말해 작가와 독자가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함께 풀어나가면서, 그 문제의 해결방식에 있어서도 독자의 탐색과 상상력의 몫을 넓게 준다는 것입니다. 일견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는 태도 같지만, 그것으로 작가는 상투성에 빠져 든 독자의 정신과 삶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질문이 아프고 충격적일수록, 그 질문의 형식이나 내용이 좋을수록 그 질문 자체 속에 웬만한 해답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가로서의 제 해답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비좁은 머리로 섣불리 문제를 해소해버리려는 것보다, 그 소설이 우리 삶에 대한 절실하고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게 하는 것도 문학 작업의 한 가지 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거기에도 그 글을 쓰는 일의 피 흘림의 자국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선생님 작품의 작중인물들을 살펴보면 불안이나 우울, 정신적 상처, 신경증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런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특히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고향나들이를 할 때면 원죄의식과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많은데…….
우리 주위에는 그 마음 가운데에 아픈 상처의 기억을 지니거나 어느 한 면 균형 잡힌 정신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설은 그 상처의 사연이나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 삶의 진실이나 세계의 심상을 드러내 보이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엔 그런 사람의 눈을 통해 범상한 일상인들이 간과하고 지나가기 쉬운 삶의 깊은 비밀들을 더욱 민감하게 포착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란 일면 그런 상처나 아픔에 대한 위로와 치유의 한 구조물이기도 하지만, 주류보다는 비주류, 긴 줄보다는 작은 줄, 넘치는 것보다, 모자란 것,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쪽에 더 눈길과 관심이 이끌립니다. 그것은 내 주변성 지향의 성벽(性癖)때문에 그런 인물형들이 자주 등장하는 듯싶습니다.
제 인물들의 고향에 대한 부끄러움은 바로 제 자신의 고향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입니다. 제 어릴 적 고향은 그 시절 어디나 다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고 남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고향을 가난하고 남루하게 떠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그 가난한 고향이 부끄러웠고 그 고향에서 쫓겨난 꼴이 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심하게는 ‘나도 그 고향을 버리고 나온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이가 좀 들고 난 뒤 그 고향과 화해를 하고 그곳을 다시 찾고 싶어졌을 때 그 옛날의 일들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습니다. 쫓겨난 자가 그를 쫓아낸 땅을 다시 찾아들 때, 스스로도 그것을 버렸다고 생각한 일,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을 찾을 때면 공연히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느낌 때문에 될수록 날이 어두운 때를 타서 들고나곤 합니다. 그 부끄러움이 내게 소설을 쓰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고향(전남 장흥)에서나 도회지(광주)로 나왔을 때의 체험을 대비적으로 한가지씩만 이야기해주십시오.
시골에서는 자연의 세계 속에서 주위의 일들을 직접 부딪쳐 만나고 관계해나가는 데 비해, 도회에서는 설명되어진 세계를 ‘이해하고 이용하는’ 삶의 길을 취해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전자에선 이 세계의 신비스러움과 놀라운 충격을 많이 경험하게 되고, 후자에선 경쟁과 소유의 싸움을 더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 어느날 형과 함께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다가 내가 사는 집과 동네와 뒷산들이 조그맣게 멀어지면서 그 뒤로 끝없이 드넓은 세상이 열려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의 절망적인 각성과, 도회지에서의 중학시절, 미국 공보원에서 들려준 서양 음악의 알 수 없으면서도 달콤한 선율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이어도> <선학동 나그네> <매잡이> 등에서 보듯 문화집단의 특유한 사유방식이나 관습에 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직접체험에 의한 소설들은 아닌지요?
체험도 있고 취재도 있겠지요. 그러나 책이나 나이가 가르쳐준 것도 많더군요. <선학동 나그네>의 경우는 나이가 저절로 제 눈을 열어 보여준 것이었어요. 저 산이 장삼을 입은 도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학이 하늘로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한다거나…….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소리였지만 내겐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가 않더니, 나이 마흔에 가까워질 무렵에 가보니 그 모습이 눈앞에 완연하게 보이더군요. 나이가 길러준 마음의 눈 덕이지요. 체험이든 취재든 그 절실한 마음의 눈, 살아있는 상상력의 눈으로 만나지 않으면 사물은 제 진실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과리의 <용서, 그 타인됨의 세계>에서 보면 선생님의 소설은 “남도소리를 등에 지고 또는 그것에 업혀 더 나아간다. 그것은 자신을 회복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타인이 되어 타인 속으로 흘러 들어가 넓게 퍼진다. 그것을 작가는 ‘용서’라는 한 마디 말에 집약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견해도 듣고 싶습니다.
남쪽 사람들의 일상 어법엔 욕설이나 신소리가 자주 섞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그 욕이나 신소리엔 별다른 악의나 목적이 없습니다. 말의 원래 기능이랄 수 있는 지칭(指稱)이나 의사전달의 역할이 없습니다. 그저 그 말 자체의 독자적 유희성을 즐기려는 면이 많습니다. 품격은 다르지만 시와 노래 같은 것의 그 비슷한 기능에 의지해 있다 할까요. 남도소리도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면이 있을 것 같아요. 거기엔 오만 가지 삶의 실상이 담기면서도 그것을 사실적으로 엮어나가기보다는 사설 자체의 질서와 흐름에 따라 유희적인 곁 소리를 수없이 동원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그 사설의 즐거움 속에 우리 삶의 진정성을 배어나게 잘 담아내고 있는 귀한 예술 형식이라 말할 수 있지요. 남도 태생인 나의 소설이 그 판소리의 방법과 정서에 의지해 빚을 진 대목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그 작품(<다시 태어나는 말>)의 결말에서 제시된 ‘용서’라는 말은 그 말의 의미론적 선택으로보다도, 혹사(酷使)와 오용(誤用)으로 인하여 그 순결성을 잃어버린 작금의 우리말들에 대한 본값 채워주기와 다시 태어나기의 한 보기말로 이해하는 쪽이 어떨까 싶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선생님이 작품에서 ‘원죄의식’ 같은 것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어렸을 때 내가 주위에서 배워 온 삶의 태도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집안에 무슨 우환이 들거나 잘못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흔히, “내 덕이 모자라서이다”, “하늘이 무서워 대명천지에 낯 들고 사립을 나설 수가 없다”며 자신의 부덕을 먼저 부끄러워들 했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 탓이오’ 정신의 선각자들인 셈이지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들 가운데에 그런 아픔이나 부끄러운 곳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 아픔과 부끄러움 덩어리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그 자신의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제법 자기 삶의 본 모습을 안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토양을 이루는 저 ‘반성의 정신’을 낳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가에 따라선 그 고향에 대한 원죄의식과 같은 부끄러움이 무서운 투지로 혹은 견딜 수 없는 굴레로, 힘찬 창조성과 무력한 체념의 이야기로 제각기 다르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제게 있어서 그 구체적인 양상은 졸작 <시간의 문>이나 <비화밀고>, <벌레 이야기> 같은 것을 쓰게 된 동기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동욱의 <진실을 탐색하는 이야기꾼>에서 보면 “진실의 한계와 소재를 탐색하는 이야기꾼의 준엄하고 분석적인 눈에 의하여 짜여 진 것이며, 이야기 짜임의 형식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두고 있는 두 층에 의한 개성적인 것”이라면서 “성정적 부드러움과 징그러움과 살벌함이 적절히 대조된 도시란 삶의 진상을 말하였다”고 선생님의 작품을 평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야기꾼’이라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군요. 우리 동네엔 참 이야기꾼이 그리 많지가 못하다는 느낌이거든요. 나 자신도 물론 좋은 이야기꾼은 못 되는 편이고요. 격자소설이나 중층구조 따위에 대해선 이미 여러 번의 논의가 있어 왔으므로 여기에선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그것은 앞에 말씀 드린 ‘열린 소설’의 구조나 ‘반성의 정신’ 같은 것들과 관련이 있음직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졸작 <매잡이>에서의 한 풍속적 삶에의 본능적인 경사가 다음에는 아름다운 전통미의 세계로, 나아가 피나는 생존투쟁의 이중적 배반양상으로 서설의 주제가 세 가지 시선에 의해 계속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그 구체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와 현실의 갈등>에서 김치수는 “그의 소설 대부분의 화자는 항상 전지전능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거나 혹은 한 작중인물의 관점을 빌고 있다”고 선생님의 작중화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역시 앞서의 ‘열린 소설’, ‘격자소설’ 혹은 ‘중층구조’ 형식의 소설 구조나 작품 의도와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해나가는 소설과정과 결론부에 이르러서의 독자 몫의 해결방안, 그리고 그를 위한 동등하고 복합적인 반성적 시선들로서의 역할의 필요성…….거기에는 화자 한 사람만의 관점이나 독점적 전횡이나 군림이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이 세상과 삶의 양식이 더없이 복잡해지고, 지식과 기능이 무한정 세분(細分)화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한 사람의 작가나 작중화자가 그 소설 속에 감춰진 진실의 열쇠를 혼자서 거머쥐고 그 전지의 천재성을 발휘할 처지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지금까지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선생님은 세계나 삶의 양식에 대해서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계는 아마도 눈에 보이는 현상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힘의 세계, 그 두 힘의 질서에 의해 이끌리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우리 눈앞에 증거 된 이성적 지배 질서인데 반해, 후자는 아직 증거 해 보일 수는 없으되 우리가 때때로 그 힘에 이끌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불가사의의 숨은 질서라 할까요. 소설은 물론 그 두 세계를 다 같이 인식과 설명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요. 하지만 한 작가가 그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힘의 질서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의 일은 결국 그 미지의 세계와 힘의 비밀을 드러내어 우리의 현상적 삶의 마당을 이끌어 들임으로써 그것을 더욱 넓혀 나가고, 그곳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보다 넓고 참되게 설명해주는 일에 기여할 목적에서일 것입니다. 졸작 <비화밀교>에서는 그것을 능력껏 다뤄 보려 했습니다만, 문학에 있어서의 이성적 세계에의 꿈이나 종교에 있어서의 내세관 혹은 구원관 같은 것들도 우리에겐 그 실제적 실현성보다 지금 이곳의 현상과 현실세계에 대한 넓은 이해와 확충, 그를 향한 개선과 상승 쪽에 보다 큰 기능과 값이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선생님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말씀을 해주셨는데, 작품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의 연애시절과 결혼에 관한 애기 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연애 얘기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니 일방적으로 털어놓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별로 재미있을 이야기도 못 되고요. 결혼은 68년에 했는데, 그것도 한 해에 이사를 네 차례나 거듭해야 했던 기억뿐입니다. 한 가지 마음에 감사하게 새기고 있는 일은 저희 결혼식 주례를 보아주신 어른의 오랜 보살핌입니다. 저희 결혼식은 대학 은사님이신 강두식(姜斗植) 선생님께서 앞뒷일을 많이 보살펴주셨는데, 나는 신혼 여행길에서 돌아오면서 변변한 사은품은 못해 드리고 모양새가 참 괴상하게 생긴 소철분 하나를 사다 드린 일이 있었지요. 그땐 한창 소철분이 귀하게 취급되던 시절이라 번듯한 물건을 하나 사 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허락해야지요. 결국은 몸체가 불구처럼 두 가지로 뻗어 나온 데다 생장마저 부실하여 사람들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저급품 하나를 사다 드리게 됐어요. 그런데 그 소철분을 선생님께서 두고두고 곱게 키워주시는 겁니다. 선생님을 찾아 뵐 때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분제의 나무를 볼 수 가 있었어요. 두 가지로 벌어진 괴상한 모양새도 나중엔 오히려 희귀한 형상으로 아낌을 받았고요. 그런데 일이 더욱 재미있게 된 것은 우리식구가 세 사람으로 늘어난 어느 해부터는 이 소철분 역시 두 가지 사이에 새 가지가 더 솟아올라 다른 두 가지에 안겨 자라는 형국으로 세 가지 모양새를 갖춰 가는 것이었어요. 벌써 20년을 넘어선 화분인데, 그 화분처럼 우리는 그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선생님의 귀한 보살핌을 입어 온 셈이지요. 그게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제겐 바로 ‘세상에서 제일 비싼 소철분 이야기’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교육에 대한 사회적 물의가 빈번한데 자제분의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계신지요.
나는 가끔 사람의 삶의 값이 어떤 성취의 정점을 기준으로 매겨지는 것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 정점 밖의 삶의 관점은 그 정점을 오르기 위한 성취의 과정으로밖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기가 쉽습니다. 그저 그 정점만을 위해 정신없이 다투면서 다른 것은 거의 무시하고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제도권 교육은 거의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삶의 갑이나 행복의 성취도는 그 사람의 인생 전 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자기성취의 총량으로 계측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점에의 도달이나 성취 그 과정으로 격하되기 쉬운 그 밖의 삶의 과정들, 유년시절이나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청소년 시절도 그 자체로서 성취 결과 못지않은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나는 15살 정도까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지냈을 뿐이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들의 소재와 정서의 바탕은 그 시절의 체험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뿐더러 나는 그 시절의 추억을 지니고 사는 것만으로도 항상 즐겁고 자랑스러우며 신선한 생기를 느낍니다. 대학 합격이란 눈앞의 정점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하고 있는 오늘의 청소년 교육 제도나 사회통념은 아이들을 제 힘으로 제대로 놀 줄도 모르는, 자동인형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가엾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아이는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 유년기와 청소년기 자체로서 어느 때 못지않게 뜻 깊고 소중한 인생의 한 기간으로 값지고 행복한 성취가 이루어지도록 해주려 힘씁니다.
선생님이 앞서 말씀하신 유년시절의 체험을 작품의 소재로 많이 쓰셨다고 하셨는데 작가로서 꿈을 키운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형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나는 이후로 그 형님이 남기고 가신 이런저런 책들과 독후감, 메모 따위를 접하면서 그 죽은 형님에 대한 생시적(生時的) 생각이나 숨결 같은 걸 자주 느끼곤 했습니다. 그 책들과 삶과 죽음의 독특한 체험…….그런 것들이 내 어릴 적 성향과 성장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6·25를 겪으면서 주위에서 본 참화와,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 돌아오신 외사촌 형님의 충고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살려 하지 마라, 벼슬길로 힘을 얻어 그 힘에 의지해 사는 길을 가지 마라, 그런 길의 공부를 하지 마라…….”그 형님이 말이나 행동으로 내게 보여준 충고가 대충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런 충고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아요. 이 노릇이 웬만한 중노동이어야 말이지요. 게다가 사람들의 눈길이나 간섭을 덜 사는 일로 여겼던 이 일이 사실은 늘 제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뭇사람들 가운데로 나서는 일이 되어버렸거든요. 그것은 나의 태생이 그리 되어먹어 그런지 육신의 일은 그리 무서워하질 않습니다. 육신의 일에선 오히려 어떤 생명의 섭리와 신선한 창조감 같은 걸 느끼곤 했었지요. 그런데 이 깜깜한 글 장사 놀음에선 끝없는 자기소모와 부끄러움과 두려움밖엔 더해 가는 게 없어요.
말이 좀 옆길로 흘렀습니다만, 본격적인 소설공부를 시작한 건 대학교 때부터였고, 등단을 한 것은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와 남은 학기를 끝내고 난 65년 가을이었는데, 월간 <사상계>지에 단편소설 <퇴원>으로 등단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 3월부터 <사상계>사(社)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이후로 차츰 문학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날까지 이 일에 매달리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여러 가지 많은 느낌을 가지도록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먼저 간략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럭저럭 해서 200편에 가까운 작품들을 요령 있게 설명드릴 수도 없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선 가급적 거론을 삼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 온 터이니, 여기서는 대략적인 작품경향의 흐름을 살펴보고, 몇몇 작품들에 대한 주변 이야기를 여담 식으로 말씀 드리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양식 가운데엔 그가 자신의 삶과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고유의 가치관을 어떻게 실현해나가는가에 있습니다. 그것들과 관계가 짙은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또는 주체적 존재자로서의 생존양식과, 그 인격체가 보다 화해와 행복스런 삶의 질서 안에 놓이기 위하여 그의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어나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과 상관이 깊은 관계 존재자로서의 다른 양식을 함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우리 삶의 양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편의상 전자의 성향 쪽은 ‘자족적 존재의 양식’이라 하고, 후자를 ‘의존적 관계의 양식’이라고 나누어 보겠습니다.
제 소설들 중엔 고향을 축으로 하여 전자 쪽에 속하는 것과 후자 쪽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전자는 주로 남도소리와 이향, 귀향의 양상을 다룬 <남도 사람> 연작과 그에 유사한 <눈길> <해변 아리랑> 같은 작품들입니다. 후자는 주로 도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상을 다룬 <언어사회학 서설> 시리즈와 같은 맥락에서 언어의 본질, 사회적 기능 따위를 탐색해본 <빈 방> <소문의 벽> <제 3의 현장>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밖에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적 변혁에 대응하여 일반적 삶의 진정성과 숨겨진 세계의 비밀을 탐색해 보려는 작품으로 <이어도> <황홀한 실종> <시간의 문> <비화밀고> <살아있는 늪> <자유의 문 > <당신들의 천국>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고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 자기변신을 꾀해 본 것으로 에세이 풍의 <키 작은 자유인>을, 그리고 일기형식의 <여름의 추상>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기준으로 보면 또 전혀 다른 모양의 목록이 꾸며질 수도 있을 테지만, 거칠게나마 일단 이런 식으로 정리해보니, 제 졸작들은 거의 이 목록 안에서 모두 거명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어도>나 <당신들의 천국> 같은 소설들은 오랜 기간 동안 독자들에게 특히 많이 익혀 온 작품으로 아는데, 그 작품들을 쓰게 된 동기와, 또 후일담 같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어도>는 이상적 삶의 지향성이 우리 삶에 있어서 현실의 질곡을 얼마나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가를 제주도를 무대로 하여 쓴 이야기이고, <당신들의 천국>은 저 70년대의 강압적 정치행태와 모욕적인 구호들에 작의(作意)를 격발 받아, 역시 소록도라는 특정조건하의 삶의 가치와 양상을 빌려 쓴 이야깁니다. 그 시절 내게는 권력 담당자들의 ‘한국적 민주주의’니 ‘인간 개조’니 ‘사회 안정과 국가안보를 위한 국민권리의 일시적 유보’니 하는 따위의 대중조작 구호와 일방적인 복종의 강요로 우리 삶의 보편적 가치의 실현과 관련하여 삶의 제약성에 깊은 의구심이 일었어요.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냥 보편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여야지 한국적이니 뭐니 특수성을 내세우는 소리가 붙으면 정체가 수상해지게 마련이지요. 권력자들이 그 한국적 상황과 처지를 내세울수록 우리의 삶은 그 특정 조건들의 울타리 속에 갇혀 들어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끊임없이 박탈당해 가고 있었거든요. 소록도는 마침 그런 권력행사의 비밀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 격인 곳이었어요. 그것이 우선은 동기였을 겁니다.
<소문의 벽>이나 <황홀한 실종> 같은 작품들도 많이 읽히는 편이지요? 그리고 근작에 속하는 작품인 <키 작은 자유인>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소문의 벽>이나 <황홀한 실종> 같은 작품은 <당신들의 천국>이나 근작의 <키 작은 자유인>과 함께 저한테 효도를 많이 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키 작은 자유인>은 90년 가을에 꾸며진 책인데, 저에겐 글쟁이로 80년대 후반을 살아 온 족적인 셈입니다.
지금까지 작가론과 개별적 작품들에 대한 주변의 얘기들을 들어 보았습니다만, 저 개인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조율사> 같은 초기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와, 선생님의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오랫동안 천착해 오신 우리의 말과 삶, 문학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최근작 <자유의 문>에서의 참 자유의 가능성과 문(門)의 의미 등, 아직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말씀을 될수록 피해오고 계시다는 아까의 말씀도 있고 하니, 거기에 대한 말씀은 다른 기회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끝으로 한 가지 작가와 비평가와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동행하는 입장이지만 작가가 보는 비평에 대한 시각은 어떤 것인지요.
새로운 문학이념이나 방법론의 제시 등, 비평의 높은 기능이나 역할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비평가나 비평작업에 대한 저의 일반적인 이해와 느낌만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우선 비평가는 작가와 작품 위에 교조적으로 군림하여 그것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려 드는 자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작가와 작품의 뒤치다꺼리나 맡아주는 뒷바라지 심부름꾼일 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반대로 작가 역시 비평가나 비평의 존재를 불편· 무용(無用)한 것으로 외면만 하려 들거나, 비평가의 이론이나 주장에 얽매여 그것을 작품으로 실현해주고 눈치를 살피는 따위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와 비평가는 지배와 복종 관계, 선도(先導)와 추종(追從) 관계, 그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그런 관계로 자리매김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행각합니다. 작가와 비평가는 상호 충격과 선의적(善意的) 경쟁의 대화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 작품에 대한 비평을 읽다 보면 저는 대개 세 부류의 느낌을 받습니다. 첫째는, 제 작품을 아무렇게나 잘못 읽고 있는 경우, 두 번째는 내 작의나 작품의 성과를 제대로 정확히 읽어내는 경우, 그리고 세 번째는 내가 의도하고 써낸 것 이상의 작품의 값,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가치를 찾아내어 더 높은 자리매김과 함께 그 작품을 자기 눈으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경우가 그것인데, 바로 이 세 번째 경우가 비평이 제 2의 창작이 되는 경우입니다. 첫 번 경우에 대해선 별 할 말이 없지만, 좋은 해설 혹은 해석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경우부턴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 ‘대화’라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충격과 창조적 대화는 세 번째 경우에 이르러야 그 참값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다만 고마움의 차원이 아니라 창조적 기쁨의 공유의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작가나 비평가는 서로 그 상대방으로 하여 자신의 재창조와 상승의 길을 얻어 더 높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함께 열어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작가와 비평가가 서로 고맙고 즐거운 존재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가깝거나 그렇지 못한 사이거나, 나는 제작품에 대해 그런 글을 보여준 비평가를 몇 사람쯤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작가와 비평가 간의 대화와 동행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보다 더 나은 전망이 있기를 기대해 보며 지금까지 장시간 대답에 응해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1992년 고 이청준 소설가의 자택이었던 잠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서 삼인행 출판사 <작가연구>시리즈 2번째로 기획되어 출간된 <이청준론>에 실린 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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