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1막~2막/2001년 출간/생각하는 백성

2023. 7. 26. 13:54이하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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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이위발 시집

 

책을 내면서

 

아침이 되면 의관을 갖추고 정좌를 하신 후, 사서오경을 펴 놓고 사랑방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시던 할아버지, 꼿꼿하면서도 대쪽 같은 성격이셨지만 눈빛만은 연못에 담긴 달처럼 그윽하셨다.

시골에 사시면서 흙 한번 손에 묻히지 않고 할머니의 근심어린 눈길마저 외면하시던 할아버지, 천자문을 배우다 딴전을 피운다고 담뱃대로 정신이 번쩍 들게 꾸지람하시던 할아버지,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마지막 선비의 길을 가시다 외로운 생을 마감하신 할아버지, 이 시집을 당신께 바칩니다.

 

 

2001년 여름

 

 

 

차례

 

책을 내면서

 

1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시뮬레이션 1/13

무성시대/14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16

마지막 휴머니스트/17

객석에서 바라보다 1/22

객석에서 바라보다 2/24

떠남과 돌아옴의 길 안에ᅵ서/25

어느 나른한 오후/27

잠을 자고 있는 남자/29

시선들 3/31

시선들 4/33

시선들 5/35

오늘의 요리-개 같은 내 인생/37

天上地上사이/41

 

2

희망사항

 

흔적 세우기/45

삶의 무게는 한 개의 토큰으로 추락한다/46

도시의 아침/48

방안에서 길을 잃다/49

희망사항/51

R의 법칙/53

개와 고양이/54

개꿈/55

거울 속에는/56

그대는/57

겨울밤 쓰래기통 옆에서/58

선택/59

퇴색한 바람이 일어서는 벼랑 끝/60

 

3

갇혀 있는 자의 문

 

시뮬레이션 2/65

시뮬레이션 3/67

시뮬레이션 4/69

시뮬레이션 5/70

시뮬레이션 6/71

시뮬레이션 7/72

시뮬레이션 8/73

시뮬레이션 9/74

폭로/75

갇혀 있는 자의 문/76

문밖에서/77

달의 몰락/78

모가지 없는 그림자/79

또 다른 바람이/81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82

 

4

평생 동안 찾아보아라!

 

평생 동안 찾아보아라!/85

함께 가는 길 1/86

함께 가는 길 2/87

호텔 캘리포니아/88

빛바랜 독백 1/89

느낌/90

바람의 傳言/91

세월이 흘러도/92

남대문시장에서/93

버스를 기다리며/95

이유 없는 반항 죄/96

유년에서 서울까지/97

 

해설·이승하

1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시뮬레이션 1

 

 

눈알이

떠돌아다닌다

날아다닌다

줄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한 점이다

눈을 던진다

버린다

그곳이 유배지다

가지만 남겼다

잎마저 덤이다

외로운 행성이다

얼굴에 물을 뿌린다

나무에 물을 준다

눈을 뜨고 태몽을 꾼다

나는 짝눈이다

무성시대

 

 

1

 

(마이크와 스피커도 없는 슬픈 독백이지만 관객도 없다)

어느 날 난-내 앞에 놓여 있는 햇살 무늬의 크리스탈 잔 속에 담긴-나를 무척이나 닮은 식은 커피를 보면서-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어-치워 버리지도 못하고-마셔 버리지도 못하고-내 갈라진 얼굴로-조그만 찻잔 속에 비춰 보기만 했었어-이미 난 오래 간다는 에너자이저 건전지를-새로 갈아 끼워야 할 곰인형이 다 되어 있었어-손과 위-발이-붓고-떨리기 시작했었어 남들은 듣기 좋으라고-적당히 때가 차면-모든 생명의 세포를 빼앗아 가는-자연의 메카니즘은 신뢰할 만하다고-덕담 아닌 악담을 서슴지 않았지만-밖의 기압과 몸 안의 압력이 이미 뒤틀려 버린 나는-식은 커피와 내 몸 안의 어둠이-필로스*가 되어-커피잔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2

 

(마이크 없는 독백은 계속되고 있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커피잔은 어둠이었어-그 속으로 바람이 불었어-흔들리는 천막 안엔 무사들이 칼과 장풍으로 일대 혈전을 벌이고 있었어 그들의 싸움을 한 귀퉁이에 앉아 바라보며-스산하게 웃고 있는 한 소년의 얼굴을 난 보았어-강변 가설극장 안에서 쏟아져 나간 불빛이 어둠 속에 떠다니고 있었지-희뿌염한 밤안개를 하얗게 밝힐 때까지-소년은 꼼짝을 하지 않는 거야-끊어졌다간 이어지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에-자신의 고막과 망막을 빠르게 접속시켜가며-칼로 그어 놓은 듯한 화면 속으로 환상여행을 떠나고 있었던 거야-아버지의 갈라터진 손등을 벗어나지 못한 채 -햇살이 지배하지 않는 곳-장풍을 쓰는 무사를 쓰러뜨리는- 칼싸움 잘하는-정의의 외팔이가 되어-한쪽 팔을 지우지 못하고-감추지 못하고-소년은 그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던 거야!-

 

 

 

 

 

 

 

 

 

*필로스(그리스어) : 친구와 애인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배경 음악조차 없이 장엄한 나레이터 목소리만이 관객의 숨통을 죄고 있다)

 

영원히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의 저자 로버트 칼크 박사는 2001년 지구의 종말이 온다반 그리스도 의 활동 개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대규모 지진 강타, 지각변동, 지구 온난화에 그 근거를 두고, 강간, 살인, 약탈 등 악의 산물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선과 악의 대결전장, 아마게돈의 날을 상기시키며 지구 종말을 예언……

 

(바깥에서 바라보는 안, 대사 한 마디 없지만 관객의 시선은 돌아보지 않는다)

 

생의 한가운데가 방 안에 펼쳐져있다 그림자 없는 벽, 거울 앞에 선 사내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부러진 상에 거꾸로 놓여진 TV , 지구수호대 독수리 오형제가 침략자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다 사내는 거울에 반사된 화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순간, 가슴속에서 빼든 장난감 권총으로 거울을 향해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긴다···소리 없이···얼굴 없는 가면들을 쓰러뜨리며···자신이 적 그리스도인 양 ···노스트라다무스를 비웃으며······

마지막 휴머니스트

 

 

프롤로그

 

평등의 원칙을 내세우듯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법정 안, 재판장을 향해 피고석이 가운데 놓여 있고, 우측엔 변호사, 좌측엔 검사가 앉아 있다. 피고석 앞에 서있는 시인, 불안한 듯 애써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재판장 : 사건번호 4441번 손해배상 청구 소송건에 대한 이 사건 소송측의 검사! 심문하십시오.

 

검 사 : 피고는 199920세기 마지막 봄날, 11, 천안역 5킬로미터를 벗어난 지점 건널목에서 달리는 서울행 급행열차를 철로 위에 서서 정지시킨 적이 있지요?(...)그렇다면, 당신이 열차를 탈선시켜 소중한 생명을 살해한 후 사회불안을 조성하여 계획된 사건이지요?(...)재판장님! 여기 앉아 있는 피고는 세계화로 가는 이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라도 살인미수죄와 국가전복죄를 추가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울러 법을 믿도 따르는 대다수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재판장 : 변호인 변론하십시오.

 

변호사 : 재판장님! 열차는 사람들을 태우고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려야 될 승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과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묵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역에 정차해 있는 완행열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급행열차의 오만불손한 일방적인 통과 절차는 어떤 이유에 서라도 정지를 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양심이라는 것을 여기 피고석에 앉아 있는 시인의 행동으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직업도 재산도 없는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이 가엾은 시인에게 무거운 죄의 굴레를 씌운다운 것은 우리들 양심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재판장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이 있길 바랍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인은 리얼리스트도 아니면서 현실을 망각한 채, 변론을 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인 피고를 감싸고 있는 것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에게 묻겠습니다. 피고는 급행열차를 전복시켜 타인의 소중한 생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죠?(...)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해 도미노적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까?(...)

 

시 인 : (대답이 없다)

 

변호사 : 지금 검사는 유도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승객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고, 다행히 열차도 파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적인 피해와 시간적인 손해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가혹한 처분이라 생각되는 바, 피고에게 다시 한번 재생의 길을 걷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곧 현명한 판단이라 사료됩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사는 지금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지만, 승객들의 정신적인 충격과 시간적인 낭비는 그 어느 것과 견주어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으며, 공무집행 방해죄와 살인미수죄를 적용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라도 엄벌로 다스려야 된다고 봅니다.

 

재판장 : 피고, 시인.

 

시 인 : (고개를 든다)

 

재판장 : 마지막 진술하시오.

 

시 인 :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아우성이 오천 년 전부터 나돌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들어놓은 제도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대는 이 슬픈 현실 앞에, 저의 돌출된 행동이 후세들에게나마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완행열차 승객들에게 놀라게 해드린 점 머리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시인의 길 꿈꾸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도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방청객 :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뜨악한 눈빛을 건넨다)

 

재판장 :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피고, 시인은 전혀 반성의 빛이 없이 평등을 사수하는 법정에서 오만불손하게 법관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이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인 불안감을 조성한 바, 원고가 청구한 손해배상 십억 원을 지불할 것을 선고하며, 이것을 이행치않을 시 감옥에서 하루 이만원씩 5, 000일을 노동으로 대처한다.

 

시 인 : (고개를 떨군다)

 

재판장 : 그럼, 이것으로 본 법정을 폐정을 선언합니다. (, , )

 

검 사 : (의기양양하게 좌측 문으로 퇴장한다)

 

변호사 : (시인에게로 걸어간다) 시인, 최선을 다했지만 안됐네!

 

시 인 : 이 세상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나요, 그게 한계인 걸요...

 

에필로그

 

시인이 걸어가는 길,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찬이슬 내리는 - 안동 교도소 - 무슨 죄 지었길래 - 갇히게 되었나요 - 안동시 교도소 - 찬 마뭇 바닥에 - 일심을 기다리다 사라져 갔나 - 편견은 안 오나요 - 영원히 안 오려나.

객석에서 바라보다 1

 

 

(E) 진도의 씻김굿 소리가 무대에서 들려온다

 

시커멓게 버캐 낀 듯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보이고

참새떼는 마당 귀퉁이에 앉아 깝신거리며

후룩후룩 솟아 올랐다간 아쉬움에 다시 내려앉고

내려앉았다간 다시 솟아오른다

암청색의 야트막한 산 너머로

비라도 퍼부을 낌새인지

구름장들이 빠르고 어지럽게 몰려오고

삽짝문 밖에 놓인 앙장과 울타리에

세워져 있는 붉은 만장들이

서로 살을 부대끼며 파닥거린다

 

(E) 곡소리와 함성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모지락스레 마음먹고 이번만큼은 안 된다고

입에서는 뜨거운 단내가 나도록

광장에서 소리치는 사내들의

신토불이를 어둠은 끝내 쫓아버리고

시간의 정지 속에 갇힌 슬픔을 끌어안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땅을 뒤로 한 채

사내들 뿔뿔이 흩어진다

 

(M) 함성은 사라지고 곡소리만 들린다

 

잡초 무성한 척박한 밭뙈기엔 불거진 늦가을

수숫대가 비바람에 휘청거리고 자갈밭의 억새꽃은

고개를 쳐들었다간 이내 숙인다

논 자락엔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 하우스가

너덜거리는데

들판을 바라보던 삽을 든 사내가 벌레처럼

등을 구부리며 긴 한숨을 내뱉더니

무너진 가슴을 치고 또 친다

 

객석에서 바라보다2

 

 

빛이 차단된 병원 건물 창살 속에서 밖을 바라보던 푸른색 가운이 하얀색 가운에게 묻는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왜 가두고 있습니까?

 

건물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자 하얀색 가운이 푸른색 가운에게 대답한다

저 사람들은 감시원들입니다 우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잖아요!

 

창살 속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푸른색 가운이 이상하다는 투로 하얀색 가운에게 되묻는다

우린 이렇게 자유를 누리며 사는데 왜 감시를 하는 거죠?

 

하얀색 가운이 지친 목소리로 푸른색 가운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은데 서로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죠!

 

건물 밖의 창살 속에는 부옇게 뜬 푸른색 가운을 닮은 얼굴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떠남과 돌아옴의 길 안에서

 

 

프롤로그

 

무더운 여름, 삭발을 한 나는 이기적 자살을 꿈꾸며 정선 아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도착한 간이역 이방인의 머리 위로 몇 줄기 뜨거운 바람이 일더니 대기 가득한 열기에 풀어져 버리고, 길 옆 탱자나무 가지에 달린 탱자만이 시퍼렇게 독을 품고 노려보고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예배당 십자가엔 까마귀가 앉아 있고,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 나를 향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동민 여러분 집 나간 개를 찾습니다. 만득이네 개가 삼일째 행방불명입니다. ……아울러, 요즘, 개 도둑 들이 설친다고 하니 각별히 유념하여, 개 단속 잘하시길 바랍니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 나를 쳐다보면서 (땡 중? 탈옥수? 개 도둑?) 예사롭지 않은 눈길을 보내자, 나는 길모퉁이에 어설프게 갈겨 쓴 민박집을 발견하곤 숨다시피 빨려 들어갔다. (내일이면 나는 저 소금강 안개에 묻히게 되리라!) 최후의 성찬이 될지도 모를 끼니를 술(성수)로 때운 후, 사전답사를 위해 안개에 묻힌 소금강 다리 위를 지나고 있을 즈음, 꼬리를 촐삭대며 개 한 마리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민박집 아줌마가 서울 딸네 집에서 데려왔다는 코미디언 같은 땡칠이 그놈이,

 

에필로그

 

다음날 아침, 밤새 마신 술로 인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고 있었다. 땡칠이를 부르는 아줌마의 앙칼진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자, 운명의 순간은 너무나 쉽게 찾아왔다. 문틈으로 들어온 안개가 나의 목을 옥죄고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서로 좀 가 주 셔야겠습니다!……땡칠이가 실종됐는데…… 이 집 아줌마가 당신을 개 도둑놈으로 신고를 했습니다. ……가시죠!) 변명할 시간도 없이, 지서까지 끌려온 나에게 아줌마는 식식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대더니 울부짖는다. (아 이고! 내 새끼! 내 새끼가 어떤 새낀데! 땡칠아!…… 니 없인 내 하루도 못 산다! 땡칠아!……)(당신! 이곳에 온 이유가 뭐야!…… 아줌마 말로는 저녁 처먹고 땡칠이 끌고 나갔다던데!…… 당신 쇠고랑 차고 싶어!……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 땡칠이와 같이 있는 걸 본 증인이 있어!…… 말 안해! 어디다 숨겨 놨어!…… 벌써 처 잡숫고 입 닦은 것 아냐!……당신 별이 몇 개야!언제 출옥했어!……그래!…… 묵비권 행사하겠다 이거지! 어이! 김형사! 이 새끼 본서로 넘겨!) 그 날 나는 개 목걸이를 차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어느 나른한 오후

 

 

(너무나 나른한 오후다)

 

누군가의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출입은 남고 금지만 지워져 있는 푯말 뒤로 팔각정이 보인다. 그 주위를 산소 마스크를 쓴 듯 뼈다귀만 남은 소나무 몇 그루 서 있고, 그 사이로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보인다. 초점 잃은 시선으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노인, 팔을 베개삼아 잠자는 노인, 그늘을 찾아 서성대는 노인,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노인들, 그 옆엔 비둘 기들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연신 찧고 있을 뿐, 무대는 평화롭다.

 

(햇살이 구름에 가려 살며시 빛을 거둔다)

(잠시 사이를 두고)

(구름이 지난 자리에 햇살이 고개를 내민다)

 

노인이 잠들어 있는 의자 밑으로 햇살이 스며들자 두 눈에 살기를 띤 고양이 한 마리가 시선을 한 곳에 고정 시킨 채 쏘아보고 있다. 시골에서 이 도시로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노인이 철지난 벙거지 모자를 쓴 채, 옆구리에 장기판을 들고 我生殺他를 곱씹으며 코를 썰 룩거리며 등장한다. 그는, 어제 이곳에서 한라산 한 갑을 잃었다. 관직에서 명퇴한 후 퇴직금으로 젊은 계집년 에게 홀려 사기 당한 후, 딸네 집에 얹혀 산다는 정노인, 그 영감탱이한테 빼앗긴 것이다. 더욱 이가 갈리는 것은 다 이겨 논 판에, 치매가 들었는지 손을 떠는 정치깡패 출신 구씨, 그 놈이 훈수만 안 두었더라도.

 

(햇살은 오후의 평화를 깬 침입자로 인해 흔들린다)

(의자 밑을 빠져나온 고양이가 햇살에 주춤거린다)

 

햇살은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얼굴이 일그러진 김노인과 냉소를 머금은 정노인을 못 본 척 스치고 지나간 뒤, 한쪽 구석진 객석에 살의에 찬 한 사내의 얼굴을 비추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이 도시에서 쫓겨난 사내의 눈빛은 언제부터 인가 고양이를 쫓고 있다. 의자 밑을 빠져나온 고양이는 사냥감이 정해졌는지 낮은 포복으로 비둘기 주변을 맴돌고 있다. 사내의 얼굴엔 비장감이 흐른다. 고양이 이빨에 찍혀 온몸이 해체되어 가는 날개 달린 새를 상상하는지, 눈빛마저 햇살에 타고 있다. 숨을 죽였다. 순간, 달려드는 고양이 발톱을 피해 우아하게 날아가는 저 비둘기.

 

(때는 너무나 나른한 오후다)

 

잠을 자고 있는 남자

 

 

(이 사건은 넌픽션이다. 트럭 운전기사가 새벽녘에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출발하면서, 차 밑에 잠들어 있던 한 사내를 심장파열로 인한 과실치사를 범했지만, 타살이냐? 자살이냐? 살아 남은 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슬픔을 본다)

 

S#1

한 사내가 종암동 색시집 보난자에서, 사랑 타령을 발정난 어미 소 울음소리 내듯 불러대는 한 여자를 만나, 붉은 커튼이 쳐진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S#2

다음날, 술에 취한 그 사내가 새벽 4시 고향 마을 면사무소 앞 도로 가에 세워둔 8톤 트럭 밑에서, 비를 피해 잠을 자고 있다.

 

S#3

병원 지하 영안실, 그 사내의 흑백사진 앞에서 가족들 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성깔을 부리고, 운전수는 피해자는 자신이라며 핏대 올리고, 조문객은 불 구경하듯 하는데, 사내는 너무나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다.

 

S#4

사건 담당 경찰은 부검을 한 사체 보관실을 성냥갑 닫듯 가볍게 닫고는, 죽음과는 관련 없는 엉뚱한 질문으로 관련 있는 것처럼, 사건 뒤엔 항상 여자가 있다는 정설이 생각난 듯, 가족에게 여자가 없었느냐고 건성으로 묻곤,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사라진다.

 

S#5

그 남자가 왜 고향에 내려왔으며, 누구와 술을 마셨으며, ? 잠자리를 트럭 밑으로 정했는지, 잠자고 있는 자는 말이 없다.

 

시선들3

 

 

생존에 대하여

 

내가 태어난 곳은 풍요롭고 자유로운 땅이었지. 조상들이 물려준 이 땅에 묻히길 원했어. 그러나, 이방인들이 이 땅을 밟으면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지. 그들을 따라가면 팔자를 고친다더라? 그렇고 그런 소문의 공지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명함에 ONLY OFFER 라고 쩍혀 있는 보따리 장사의 눈빛에 걸려들었어, 나는 눈곱만큼의 햇빛이 들었다간 이내 사라지는 후미진 골목의 가건물 안, 투명한 유리 거울 속에 갇혀 있었어. 포주인 주인 눈치 보면서, 언어도, 문화도, 삶의 방법도 다른 이곳에서, 강제적으로 주인이 간택한 숫놈과 합방한 후 새끼까지 낳게 되었지. 하지만, 산고의 후유증도 채 가시기 전에, 내 새끼들 농약 묻은 배추 먹고, 먼 이국 땅에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어. 귀엽고, 이쁘게 생긴 이유 하나만으로 너희들 노리개가 되었지만, 나는 말하고 싶어! 너희들이 쳐 놓은 생존의 그물에 햇살마저 걸려들어 서서히 썩어갈 것이라고.

 

생존에 대한 변

 

내 새끼들 저 세상으로 보내고 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 전, 길 찾지 못해 헤매다 우연히 우리를 발견한 사내는 초라한 시인이었어. 좁은 유리문을 들어선 사내는 앵무새가 되어버린 주인의 상술적인 꼬드김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를 간택하였지. 잠시, 사내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곳이 달동네 반 지하 방이었어. 그 날을, 나는 기억할 수만 있다면, 기억하고 싶어. 함께 추구해야 할 생존의 최대가치인 자연의 질서마저, 물질에 현혹되어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너희들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정 난 몰랐었어. 사내는 연신 알지 못할 웃음을 흘리며, 신기한 둣 밤늦도록 내 주위를 맴돌며,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진수성찬으로 대접 받은 그 날을, 고향을 떠나오기 전 때깔 좋은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환멸과 저주까진 내리지 않았을 거야.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이제 나는 사내의유일한 인 애완용 햄스터*로 세상을 쳇바퀴 돌리듯, 돌리고, 돌려, 제자리로 돌아갈 그 날까지,

 

 

 

 

 

 

 

*햄스터 : 쥐과에 속하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

시선들4

 

 

바퀴벌레에 대하여

 

너 참 잘 만났다. 오늘, 너로 인해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복수의 칼을 뺀다. 언제부터인지, 너희들과 숨바꼭질하면서부터 시작된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너희들을 만나면, 너희들 세상을 폭파시켜, 존재의 의미마저 깡그리 없애 버릴려고 별렀었는데,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 있는 너, 너를 만난 것은 숙명이라면 숙명일 수도 있겠지. 그동안 너희들의 지은 죄가 인류 역사의 굴레에 묻혀 버렸다 해도, 뻔뻔하게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한, 그 복수는 우리들 시대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나의 후손들도 너희들과 맞서 투쟁을 계속 할 것이다. 검은 갑옷으로 장막을 친 채, 야행성인 너희들이 이제는 벌건 대낮에도 거리낌없이 출몰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도둑고양이보다 더욱 탐욕스럽게 얼마나 많은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빨아먹었던가, 종족번식을 최대무기로 이 세상을 우리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인해전술로 맞서고 있지만,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인류의 적으로 너를 심판한다.

 

바퀴벌레의 변

 

나는 이 인간을 만나게 되면서 숙명을 믿게 되었다. 하필이면, 고문의 일인자가 사는 집에 기어 들어온 것부터가 제삿상을 스스로 차리게 된 것이다. 동지들의 만류에도 홀홀 단신 나선 것이, 그것도 벌건 대낮에, 후회도 해 보았지만, 이미, 이 인간의 눈에 포착된 나로선 사면초가다. 눈 깜짝할 사이, 매서운 손바닥이 얼굴을 가격한다. 아프다. 맞아 보지 않은 동지들은 모를 것이다. 이번엔 담뱃불로 서서히 나의 몸통을 누른다. 온몸이 오므라들어 배를 뒤집어 죽은 체도 해보지만, 소용없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잠시 나의 탈출 계획을 포착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의식이란 책으로 방어막을 친 채 노려보고 있다. ! 여기서 죽어야 된단 말인가? 나는 불 고문은 싫다! 아예 변기통에 수장을 시켜다오! 이런 나의 애절한 선택마저도 묵살한 채, 이 인간은 쾌감을 즐기고 있다. 일 센티만 기어가면 고지가 바로 저기인 데, 몸부림도 쳐보지만, 원위치다. 이젠 장렬하게 최후를 마쳐야 한다. 나의 후손 바퀴벌레들이여! 우리의 적인 인간의 고문에 대하여 최소한의 양심도 보여주지 마라! 일상을 가장한 살의를 밥 먹듯이 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

시선들5

 

 

1

4호선 지하철 안, 중앙에 서 있는 바싹 마른 나무토막의 사내를 시선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평면이나 대칭으로 보지 않는다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얼굴을 가지고 첫인상이 지랄 같다, 먹다 남은 뼈다귀 같다, 얼굴에 멍인지 반점인지 모르지만 아마, 깡패? 알코올중독자? 아니면, 거지? 마약중독자? 일방적 사고의 획일성에 대해 흐뭇해하는 시선들.

 

2

달리는 중심의 무게는 원심력 때문에? 시선들 때문에?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무토막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놀란 소리의 반향은 또 다른 소리를 낳고 시선들은 호기심으로 바뀌어 나무토막에 고정시킨다 눈을 뜬 채, 온몸은 전기에 감전된 둣 뒤틀고, 입에는 우윳빛 거품이…… 용감한 시선이, 부등켜 안으며, 인간이기를 호소하는 눈빛,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예요! 빨리 병원으로 옮깁시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시선, 여보게! 총각! 그냥 놔두게! 그 사람 병은 내가 아네! 을 떼어낸다고 이 떨어지나! 타고난 지 팔자를 어쩌겠나!……

 

3

시선들은 내려야 할 곳에 내리고 타는 시선들은 타지만, 가까이하기엔 두려움, 멀리하기엔 신기함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나무토막이 한두 번 꿈틀거리더니, 슬그머니 일어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보아란 듯이…… 시선들은, 속은 기분으로, 나무토막의 뒤통수에다 가면의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

 

 

오늘의 요리 개 같은 내 인생

 

 

첫째거리

(바라보는 시각에서 무대는 어둡다)

 

조명 없는 무대에 무성영화처럼 대사 없이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방안에 흑백 텔레비전이 불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구석 모퉁이 앉은뱅이 책상 위엔

성인잡지의 요염한 여배우의 정지된 얼굴이

요절시인 시집 위에서 비웃고 있다

짜다 만 치약과 털 빠진 칫솔이 토막 난 비누 사이에

널브러져 있고 때묻은 담요 한쪽 깨진 접시엔

꽁초가 쪼그라들고 있다

그는 시인이며 백수다

움푹 패인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보상자를 켠다 숙달된 조교처럼

변함없이 화면에 나타난 것은 오늘의 요리프로다

살찐 통돼지 같은 사회자가 유명인사 집을 방문해서

오늘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개장국만드는 법에 대해

군침을 흘리며 설명한다

어색한 표정을 감추며 앞치마를 두른 유명인사는

서투른 칼을 들고 개고기는 이렇게......

그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고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대리만족이나 희망사항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는 담요 속으로 잡지를 들고 들어간다

 

 

둘째거리

(바라보는 시각에서 무대는 바뀌었지만 어둡다)

 

종로 3가 호모들의 술집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

파고다 극장이 보인다

오늘의 프로도 역시 동시상영이다

개같은 내 인생’ ‘뼈와 살이 타는 밤

1110, 삼월 초순인데도 진눈깨비가 휘날린다

어두컴컴한 심야극장 안, 그가 무엇을 찾고 있다

김승희 시인은 요절시인론에서

숙명적으로 요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해한 수수께끼 같은 타나토스의 힘을 느낀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시인의 죽음이 하나의 피리어드가 아니길 바라며

겉과 속이 다르듯이 그 또한

철저한 이중 성격자다

문학기행도 하고 영화도 보고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기 위해

화면이 노골적으로 뒤엉키자, 그는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옆에 앉은 사내가 유혹을 한다

한번만 대 주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그는 일어선다

 

 

셋째거리

(바라보는 시각에서 무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둡다)

 

60년대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 보인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동

초가집이 듬성듬성, 간혹 기와집도 보인다

여름 복날 정오 무렵

마당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대추나무 한 그루 보인다

그를 친구처럼 동생처럼 잘 따르던

누렁이가 매달려 울고 있다

밑에선 한 농부가 칼을 갈고 있다

의식을 치르듯이 사뭇 경건하고 근엄하다

도끼로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친다 다시 한 번 친다

한 번은 죽이기 위해 한 번은 확인사살을 위해

시인의 개는 두 번 죽었다

병든 시인을 위해

 

(필름도 끊기고 막은 내렸지만 무대는 여전히 어둡다)

 

天上地上 사이

-꿈속의 현실

 

 

S#1

武陵桃源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안개가 있을 법도 한데 안개는 보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면 투명한 벽으로 에워싸인 정자가 보이고,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도포를 걸쳤고, 상투를 틀었고, 한 손엔 요술 지팡이가 아닌 누렇게 변색된 天上法典을 들고, 진짜인 듯 가짜처럼 수염도 달려 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苦惱의 얼굴로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다)

 

S#2

두 얼굴 중 노을빛처럼 생긴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이 붉은 단풍같이 홍조를 띤 채 무릎 꿇고 나란히 앉아 있다, 수염 앞에. (노을빛이 먼저 입을 연다) 제가 단풍을 처음 만났을 땐 어느 가을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우리는 첫눈에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곧바로 궁합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保佑하셨던지 우리는 매일 만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린 애인 사이가 되었고, 질투심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말로 불륜이라고들 했지만……저는 단풍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단풍이 도취되어 말을 받는다) 우리들을 손가락질하는 자들은 가슴이 없는 자들이며,

모가지도 없는 자들입니다 저는 노을빛으로 인해 세상에 다시 태어났고, 저의 아름다움 역시 노을빛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빛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S#3

수염이 가을 하늘을 본다.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다시 하늘을 본다. (사이) (갑자기 손가락을 허공을 찌르더니) 저 하늘 당신들 거야! 가져! 시간이 없어! 저 하늘도 조금 있으면 어둠에 묻힐 거야! 死藥이라고 생각하지 마! 빨리 선택을 해! (두 얼굴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지상의 들에 집착을 하지 마! 빨리 결정을 해! (갑자기 두 얼굴은 마주보면서 오열을 한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나를 시험하려고도 하지 마! 나도 천상의 인간일 뿐! (두 얼굴은 애원의 눈빛으로 수염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들려줄 말은 아무것도 없어! 만약에 있다면, 천상의 개들도 짖을 땐 밖에 나가 짖어!

2

희망사항

흔적 세우기

 

 

밤을 짜깁기하는 저녁 거미들이

작은 입자가 살아 숨쉬는

일상적인 천정무늬까지

삼켜 버리면

 

도시는 잠들고

아파트의 창문은 총구되어

빛을 향해 사격을 가한다

 

빛이 어둠에 하나씩 소멸되자

하늘은 별들과 함께 도망치고

침묵은 살아서 꿈틀거린다

 

침묵은 도시를 가슴에 안고

거대한 풍선으로 부표처럼 떠돌다

돌연히 창을 뚫고 타오르고

 

빛줄기는 침식되어 어둠의

품속으로 파고들면

일상의 문은 열린다

 

삶의 무게는 한 개의 토큰으로 추락한다

 

 

오늘이

어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산 지 오래다

나는 환자다

두 발을 지탱하고 있는 오래된 내 구두에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가슴도 뚫려 있다

배꼽시계가 울면, 이불 속에서 튕겨져 나와

로봇이 된다 횡단보도 앞

가로막는 질서에 여유를 부려 보지만

파란 신호등을 천연덕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악의에 찬 마귀 같아 보여

뒤통수가 욱신거린다

 

상태는 심각합니다

절대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의 말이 오진이 아니라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먼저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숨이 차다

뒤에 선 사내가 어깨를 잡아챈다 몸이 휘청거린다

우릴 허수아비로 아나! 누군 빨리 가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줄 서 있는줄 알아!

아침부터, 재수 없게!…… 빨리 뒤로 안 가!

사내의 눈빛에서 나를 본다

버스는 이미 떠났고, 떠밀린

삶의 무게는 한 개의 토큰으로

추락한다

 

도시의 아침

 

 

도깨비 같은 아침이다.

누우면 다리가 접혀지는 한 평 반

깜깜한 유리감옥 속에 숨어 있는 나에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 눈을 찌르는 술래 같은 햇빛.

적과의 동침에 만족한 듯 유유자적하게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이무기 같은 바퀴벌레.

밤새 입과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빨아대던

타다 만 꽁초 옆엔 창녀의 음부처럼

널브러져 있는 구겨진 원고지.

정화수를 찾아 먼 듯 가까운 듯 미로 속을 헤매다

냉장고 문을 열면 능글맞게

나의 목을 옥죄는 물오징어.

문 밖에서 들려오는 요령소리

두부 파는 아저씨 사라지자,

간수가 죄인 부르듯이 2848 이판사판

차 빼 달라고 못 빼겠다고 악을 써대면

하품소리, 철문 여는 소리, 엔진 소리,

나도 모르게 창살 안으로 시선을

돌린 채 화장실로 들어가

구멍 난 위장 속 아침을 배설해 보지만

지독한 변비다.

방안에서 길을 잃다

 

 

천장에 붙어 있는 내 발바닥은

형이상학적으로 기다렸다

내 다리가 예의 바르게 펴지고

소리가 멈추고 그녀의 허리가 정지하기를

평온과 휴식

해학적인 노력 그

설레임으로

 

홀로 베개에 주름을 새기며

방안에서 길을 잃고

어린아이 되어 울다 절망해 버리면

슬픔은 늘 한발 앞서

빈 껍질이 된다

잠이 든 내 곁에서 혼자 하는 놀이를

터득한 그녀가 내 가슴을 깨워도

 

이런 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지 않지만

욕망을 핥아먹으며

절망을 내 것으로 할 때

그것은 내 발바닥에 자랑스럽게 눌어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고독은 절대로 수마에

지지 않듯

희망사항

 

 

일천구백구십칠년 유월 십오일 높은 곳 奉天에서 낮은 곳 開花로 이사를 했다. 보증금 육백에 월 이십 만원 방 두 칸짜리 사글세 방 이층집이다. 이 집엔 누구나 찾아올 권리가 있지만,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첫날 밤, 주인집 아주머니가 식식거리며 올라와, 구름다린 난간에 서서 一喝하길, 책이 이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방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집이 무너지겠다고...... (! 이런 날벼락도 다 있구나!) 이 아줌마가 치매에 걸렸나, 책 귀신이 붙었나, 意識에 압사 당한 가족이 있나...... (! 출판사가 망해 반품되어 돌아온 책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니는 내가 죄인이지!) 이 집에 책 들고 오는 사람은 출입금지다. (책 때문에 더 낮은 곳으로 쫓겨나긴 싫으니까!)

 

빈손으로 왔다고 해도 안심하긴 이르다 이 집을 통과하기 위해선 구름다리를 넘어야 한다 추락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무사히 구름다리를 넘어왔다 하더라도 구십 도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올 수 있는 쪽문이 있다 무릎을 꿇어야만 볼일을 볼 수 잇는 화장실이 있다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나 무릎을 꿇고 빌어보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집에서 몇천 번 몇만 번 고개 숙인 채 무릎 꿇더라도, 제발 출입금지만은 해제시켜 달라고......

R의 법칙

 

 

R은 한 사람씩 순서대로 헤어지고 만나는 법이고,

(가는 사람 붙들고 오는 사람 모른 척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R은 헤어짐과 만남은 동시다발적이거나, 전무한 상태이거나, 둘 중의하나고,

(자신에 대해 자신을 전혀 모를 때 가장 평온함을 느낀다)

묘은 상처가 있다면, 상처를 주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남길 원하고,

(주지 않는 상처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R은 생리적으로 변신엔 능숙하지만, 우울해지더라도 전화기로 달려가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

 

 

졸부 덕구씨가 돈독이 올라도

보통 오른 것이 아닌데 이번엔

그린벨트 안에 호화별장 짓다가

신문에 난 이름 석 자가 대견하다는 듯

흔들의자에 앉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옆에 있던 메리가 나비를 보고

나비야! 너는 차아암 좋겠다!

늘상 주인 방에서 놀 수 있으니까!

메리야! 그래도 넌 네 집이 있지 않니!

, 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단다!

나비야! 그래도 난 네가 부러워 죽겠어!.

,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지만

, 이 목걸이 때문에

개꿈

-IMF풍경

 

 

TV 보면서, 지 새끼 머리통에 들어가지 않는 모자 쑤셔 넣다가, 머리통 큰 건 지지리 못난 지 애비 닮아 가지고, 안 꺼! 빨리 꺼! 다 꺼! 형광등도 끄고! TV도 꺼! 니 자신도 꺼! ! 못 꺼! 안 끄면, 오늘 니 죽고 내 죽자! 에이! 뒈질 놈! 허구한날 죽는 소릴 입에 달고 다니더니 뒈지지도 않고 아예 날 죽여라 죽여! 돼지꿈 꿨다고 돈 빌려 복권 사더니 싸그리 꽝이라고 병신 같은 놈 개꿈 꿔 놓고 돼지꿈 꿨다고 허풍 떨더니 싸다 싸! 지 새끼 머리통 커진 줄도 모르고……

 

지랄같은 세상! 한번 죽다나 살아 봤으면!

거울 속에는

 

 

내가 찍어 놓은 빛 바랜 사진이 있다

 

이끼 낀 바위에 소나무 잔가지가 비끼어 서 있고

쨍쨍한 햇볕은 쏴 소리를 내며 逆光線으로

실뱀 같은 두 갈래 길을 비추고 있다 그 중심에

한 여자가,

 

내 거울 속의 의식을 더듬고 있다

 

나의 가슴을 가위로 자르고 붙이고

상처 난 모가지엔 올가미를 씌우고

그 끈이 허용하는

기억의 시간 속에 갇힌 채

 

빨간 단풍잎 하나를 들고서 있다

 

母川子宮으로 돌아갈 그 날을 기다림으로

내가 찍어 놓은 말뚝에 박혀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한 여자가,

그대는

 

 

독립된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그대와 결합될 때 고독하다.

시는 시어의 거울을 벗어날 수도 있다.

사물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한,

 

그대가 고향을, 고향이 그대를 버릴 때 고향은 침묵한다.

시는 시어의 고향을 벗어날 수 없다.

떠남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는 한,

 

뒤집어져 버려도, 그대가 안과 밖을 구분 못할 때 절망한다.

시는 시어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패러독스와 리얼리티가 공생하는 한,

 

왔다 사라지면, 두렵고, 찰나

서글프게,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시는 시어의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

시의 가슴이 가슴으로 남아 있는 한,

겨울 밤 쓰레기통 옆에서

 

 

내 얼굴을 찾아 헤매는 먼 기억 촉의 가면을 벗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즐비한 여관 골목 쓰레기통 옆에서 허연 뱃속을 드러내 놓은 불어터진 밥알이 얼음 속에 갇힌 미라가 되어도 젖가슴 만한 하얀 비닐봉지 사이를 뚫고 삐어져 나온 흐물거리는 콘돔이 티슈에 싸여 나뒹굴어도 쓰레기통 속에 갇혀 버린 옹녀와 변강쇠의 환생을 바라지 않더라도 자동차 바퀴에 깔려 시커멓게 말라가고 있는 도둑고양이의 무덤 앞에 코를 씰룩거리며 맴만 돌고 있는 이빨 빠진 한 마리 개가 될지라도 내 얼굴에 달라붙은 당신의 가면을 지우지 못하고

 

선택

 

 

산란중인 물고기 내장 터진 듯 살벌한 도시에

오늘도 어김없이 봄비는 주거니 받거니

내린다. 카페 여자의 일생공중전화부스에서

찔러 넣은 주머니 속의 동전 여섯 개 중

다섯 개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추방시키고

고독한 한 개와 은밀한 내통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릴 적 소풍 가서 보물을 찾을 때 기분만큼

크낙한 떨림으로 비를 품고 들어온 그녀를

만났다. 선택의 餘地는 없었다.

흐느끼듯 여인숙 지붕 위로

봄비가 울음비로 바뀌는 그날 밤 그녀와

情事를 가졌다. 여자란 처녀막이

찢어지는 아픔 때문에 평생 사내에게

바가지를 긁으며 복수를 한다는 어머님

말씀이 기억 속으로 꼬물거리며 고개를 디밀어도

낚싯줄에 달린 바늘 같은 비수는

에덴에 박힌 지 오래다.

 

퇴색한 바람이 일어서는 벼랑 끝

 

 

한탄강 물줄기를 어지럽게 돌아

동마장 어둠 속에

오줌 줄기 한참이나 뽑아내고는

카바이트 녹인 불 속에

발가벗은 참새와 슬픔 한 잔

 

뱉은 말은 길 잃은 미꾸라지 되어

밤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공중전화에 매달린 수많은

이름들에 묻혀서 애인도

숨어 버렸다

 

빌딩의 群像들이 뿜어내는

네온사인 불빛으로 제식걸음 걷다가

깡으로 토해내는 빛 바랜 군가 사이로

철조망 바람소리 흩어져 내릴 때

전봇대 끌어안고 눈물 쏟는다

 

반 쪼가리 나라 지키느라

빛을 잃어가던 여자 하나 못 지키고

술값보다 얇은 지갑 앞에서

고향을 닮은 타향의 음부 속으로

푸른 빗물 흐르는데

 

가등에 박힌 젖은 깃발만이 용솟음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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