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어느 모노드라마의 꿈>3막~4막/2001년 출간/생각하는 백성

2023. 7. 26. 14:00이하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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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갇혀 있는 자의 문

시뮬레이션 2

 

 

그림자 하나가 코카콜라를 물고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누워 있다

대굴대굴 뒹굴고 있다

화면 밖의 얼굴이 비웃고 있다

시물시물거린다

입가에선 검은 피가 흘러 내린다

안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임의 법칙이다

불도저 소리 포크레인 소리 크레인 소리

아파트가 절단되고 있다

하늘이 콘크리트로 덮여 있다

솜털이 일어선다

빗줄기 소리 환청으로 다가온다

아가리 벌리고 기어온다

귀를 세운다

아랫입술을 물어뜯고 있다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들이 쏘아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딱정벌레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수많은 기호들이 꼬물거리며 따라온다

목을 감으려고 한다

핏빛이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킨다

코드가 끊어진 동굴 속이다

더럽게 더운 날이다

시뮬레이션 3

 

 

당신 거울 속에 갇혀 있는 나는

강물 속에 빠져 있다

아스팔트 바닥에 자동차 이빨 가는 소리에

푸푸-푸 당신이 내뿜는 입김

코를 찌르는 냄새로 엄습하고 있다

눈 가는 곳마다 발 가는 곳마다

당신이 남긴 일그러뜨린 거울들뿐이다

부서진 당신 자식들은 기운 없이

늘어진 팔과 다리를 온 세계에 파묻고

눈깔만 휘둥그렇게 뜨고 늘어져 있다

티끌을 뒤집어쓴 얼굴, 얼굴 또 얼굴......

무겁게 머리 위를 덮고 있는 하늘 아래

食傷하고 있다 飽食餘毒으로 가는 곳마다

영양실조로

아니다, 당신이 아니다, 버러지다, 쥐새끼다, 당신은

거울속에 해골바가지 걸어 놓고

마치 일개미가 노동이 마지막 보루인 양

피곤한 시대의 그 길로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당신의 거울은

선심 쓰듯 意識만 남겨 놓고

깊은 강물의 발을 밟고 서서 현실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내 발은,

시뮬레이션 4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거울 안으로 사라진다 한 마리 파리가

바르르 기어가다 미끄러진다 다시 기어간다

떨어졌다간 올라가고 오르다간 떨어져

입을 칵칵 벌리고 배를 드러내 놓고

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발을 포들포들 떨고 있다

 

그대 거울 안에서 두 눈은

온 천지 복사꽃 불길로 퍼져 흐른다

당신이 탄 기차가 떠내려간다 흰 바람이 분다

붉은 소가 흰 김을 토하면서 달아난다

파리가 다시 긴다 헐떡거린다 주저 앉는다

거울은 누워 있고 그림자는 일어선다

피었던 복사 꽃 봉오리가 떨어진다 쑥국새가 운다

개울물도 실오라기를 벗고 있다 모두

꿈같이, 裸身으로 취해있다

그대 길 안에서

시뮬레이션 5

 

 

나는 지금 한강 둔치 계단에 서 있다

강물엔 그대가 그어 놓은 不連續線이 보인다

착잡한 하늘빛이다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분다

물은 바람에 역류하고 있다

가로등에 걸린 거미줄이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두 발은 거부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발바닥 밑에는 날선 돌계단이 시간을 잘라먹을 듯 낼름거리고 있다

두 눈만은 강물의 행동반경을 놓치지 않고 있다

소낙비 쏟아진다 사나운 짐승이 떼 울음으로 운다

강물은 비에 얻어맞아 온몸이 붉게 멍들고 바람은 사라지고 없다

계단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몸을 털며 햇빛을 찾고 있다

그대 가슴에 무수히 죽은 꽃들도 비에 젖어 떨고 있다

이 순간 가볍게 전율하는 내 손가락은

강물 속의 바람만 그리며 서 있다

시뮬레이션 6

 

 

얼굴을 발가벗는다

타임담배를 물고 있다

구멍이 뚫린 달이 비웃는다

오줌이 마렵다

마스터베이션을 한다

물에 빠진 고래가 악을 쓴다

목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이다

 

벌이 머리에 침을 꽂고 간다

가차없이 의식이 흩어진다

이슬이다

취하게 만드는 독한 시선이다

부엉이 눈빛이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요사스런 불빛이다

눈물이다

 

시뮬레이션 7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다

심장 속의 거미가 알을 까고 있다

불안감은 촉수다

가슴에 호스를 박고 의식을 입으로 토해본다

물이 나오지 않는 녹슨 수도꼭지다

발 밑에선 땅이 흔들린다

공기 속엔 들짐승의 비릿한 냄새가 무겁게 떠 있다

어미 소의 눈에도 진물이 흐른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시계가 빠져나간다

코를 벌름거리며 승냥이가 손을 내민다

텔레비전에선 여전히 큰소리만 울린다

 

내 시체를 숨기고 싶다

시뮬레이션 8

 

 

거울이 공중에 떠 있다

뼈만 남은 액자가 매달려 있다

 

벽 안에 갇힌 물고기가

입을 다물고 있다

 

미로 속이다

 

투명한 유리가 벽이 된다

뭉크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시가 보이지 않는다

액자 속에 내 얼굴이 박혀 있다

시뮬레이션 9

 

 

나는 나무에게 말한다 나무도 말한다 말하지 않는 나무와 말하는 나무는 나무만이 안다 그 경계선에 그대가 서 있다 기억과 시간이 역류하는 지점에 배꽃물이 흐른다 검은 나비의 날개가 하늘을 포위한다 미치지 않는 그대가 미친 그대들뿐이라는 숲 속에서, 탄생이 소멸과 널뛰기 한다 소멸이 탄생을 저주하며 속울음 운다 처절한 소멸의 절규다 나무도 무너뜨리고 산도 불타오르게 한다 미친 그대들의 슬픈 탄생이다 나무에 대한 끔찍스러운 테러다 나무에 새긴 내 얼굴 말라죽은 개미 형상이다

폭로

 

 

네 눈에, 내 눈에, 눈은 함정이었어, 늪이었어, 깊은 터널이었어, 찢어진 스커트였어, 이빨 빠진 지퍼였어, 올 나간 스타킹이었어, 눈을 감았어, 기다림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땐, 미쳐버릴 것 같았어, 네 눈이 붉어지는 것을, 미쳐버릴 것 같은 욕정에 떨기 시작했어, 잠시, 네 눈에, 내 눈이 녹아내리더니,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어, 이상하게도, 네 눈과, 내 눈은, 의식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어, 그것은 분노 때문이었어, 날마다 붉어지는 가증스런 눈을 노려보면서, 내 행위는 네 이해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없었어, 그저 바라만 보아도 붉어질 뿐이었어, 네 눈에, 내 눈이, 붉어진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열정이라고 욕할 수 있어! 너희들이!

갇혀있는 자의 문

 

 

1

잡아당겨도 열릴 것 같지 않던 문, 황혼이 우습게 찾아 들었다가 우습게 사라진 사이, 잽싸게 지나간 황소바람 꽁무니에 붙어 들어선 문 안에, 그 누구도 주지 않은 상처에 스스로 갇혀, 허상만 삐억삐억 빨고 있는 절박한 얼굴이 붕어눈을 하고 있다.

 

2

문 밖에서 교태를 떨며 흐느적거리는 허깨비의 그림자가, 또아리를 튼 채 가랑이를 쩍 벌리고 있는 땀에 젖은 여인의 머리카락만 바라보다, 지네의 발을 가진 수많은 촉수가 밟고 지나가자, 절망을 에워싼 표피 자국만 홀로 문 안에서 떨고 있다.

 

3

머리를 덮쳐 누르는 거대한 자궁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정체를 식별할 수 없는 지독한 흉몽만 꾸고 있는, 시어빠진 애련에 찌든 밤, 문의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지 않듯, 문 밖으로 밀려났을 땐, 문 닫히는 소리만 처절하게 들린다.

문 밖에서

 

 

익숙했던 낡은 자전거 다리를 감고 있는 자물통의 암호를 풀지 못한 채, 문 밖에서 나는, 애인 사진을 마누라 몰래 지갑에 넣고 다니던 은밀함마저 빼앗겨 버리고, 마지못해 들고 다니던 때묻은 상상력마저, 어리석은 고정관념에 차압당해, 간밤에 먹은 술로 닳고닳은 구두마저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문 밖에서 나는, 접시에 썰어 놓은 낙지 다리모양 제멋대로 뒤엉킨 두 다리가, 노란 신호등에 걸려, 가슴에 꼭꼭 숨겨 두었던 고향의 산수유 꽃망울이 발가락 사이로 터진지도 모른 채, · · · · · · · · · · · · · · · , 이미 낡아버린 한 장의 사진이, 빛이 없는 곳에선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뒤따라온 그림자도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도 시각을 달리하면 살아 움직일 수 있다지만, 호숫가의 바람소리는 호수 위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들린다는 전설을 믿지 못하고, 문 밖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거린다

달의 몰락

 

 

1

나와 내 그림자는 세기말의 도시가 黃砂에 갇혀 버린 지도 모른 채, 손바닥 뒤집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손이 칼인 양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찌르기 시작했어, 그러다 갑자기 동시에 우는 거야, 미친 듯이,

 

2

우울증의 포로가 된 나와 내 그림자는 구름다리 난간 위에 앉아, 빌딩 꼭대기의 깜박거리는 黃土빛 신호등을 바라보며, 내 그림자는 달나라에서 온 우주선이 나를 부르는 신호라고, 달나라에 가고 싶다고…… 나는 황무지인 이 도시가 달이라고…… 달의 몰락을 소리내어 노래 하는데, 지네, 지네, 달이 지네…… 다리가 일방적으로 끊어지듯, 컬러 화면이 예고 없이 흑백 속으로 사라지 듯, 지는 달이 도시를 밖으로 몰아내도,

 

3

내 그림자와 나는 손바닥 뒤집기 놀이를 멈추지 않았어. 서로 바뀐지도 모른 채, 밀레니엄 안에서 동시에 달을 보고 웃는 거야, 미친 듯이.

모가지 없는 그림자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엑스트라다

 

포장마차가 보인다. 참새와 방앗간, 오늘 한잔 어때요, 내일도 오시겠죠, 사람들을 유혹하는 그런 문구가 없다. 실내에는, 그냥 아줌마로만 통하는 아줌마와,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귀퉁이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둘 다 이름 없이 자기로 통한다.

 

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자기, 화내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정직해지고 싶다는 거야, 자기, 분노는 정신적으로 톡 쏘는 사이다 맛이거든, 자기, 왜 웃는 거야, 웃음은 심리적인 연막이지만 정신적인 배팅이거든, 자기, 화장은 왜 했어, 자기, 분 바르는 것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 한 허영에 불과한 거야, 자기, 날 교육시키는 거야, 자기, 교육은 선생의 얼굴이 바보로 보일 때까지 노력하는 과정이래, 자기, 요즘 유행하는 재즈가 너희를 믿느냐래 알아, 자기, 재즈는 하반신으로 듣는 음악이래, 자기, 우는 거야, 울긴 왜 울어, 자기, 염분을 억지로 쥐어 짜내 버리는 건 비경제적이잖아, 자기, 줄담배 피우고 있잖아,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래, 자기, 죽으면 어떡해, 자기, 여자들 유방암이 왜 많아졌는지 알아, 자기, 담배 피우는 남자가 유방을 빨기 때문이래, 자기, 꽁치가 타잖아, 이놈은 등이 뜨거울 텐데 왜 돌아눕지도 않아, 자기, 제 살 타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자기말고 또 있잖아, 자기, 이제 일어나, 가자, 자기, 자가용 때문에 죽어버린 步行思想속으로 걸아가자, ,

또 다른 바람이

-한 세기의 마지막 가을밤에

 

 

덜 익은 모과 빛으로 채색된

떠나는 가을 틈새로

배암의 눈깔로 깊숙이 일어서는

한 줄기 바람

개구멍 사이로 껍질을 깨고

고개를 쳐든 병아리 젖은 털 위엔

거미줄에 걸린 파리 한 마리

퀭한 눈빛으로 멀뚱히

난파된 공간을 무너뜨린 채

파멸의 시간을 기다림으로

빗물 한 방울에도 이 밤은

무너질 것 같은

또 다른 바람이

우리를 버리고 가는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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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생 동안 찾아보아라!

 

평생 동안 찾아보아라!

 

 

내 발가락 하나도 세울 줄 모르던 나는, 환상이 비치는 것 같아, 눈이 시리도록 햇살을 쳐다본 적이 있었지, 변기통 앞에 서서 맨 처음 인간의 자아발견을 하던 날, 나는 평등을 내세우며 자신에게 충실한 보초병이 되도록 길들였었지, 내 육체가 허망한 갈림길에서 거대한 슬픔으로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이 부모의 하룻밤 등잔불 밑이라는 것을 안 이상-나는 조용히 살다가 갈대처럼 꺾이어 땅속으로 입적하길 바랐지, 그러나, 어둠이 청소해 가 버린 사과나무 밑에서 썩은 붉은 달이 떨어지길 기다렸었지, 죄인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간수들마저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는 철조망 밑에 쪼그리고 앉아, 간사한 양면을 가진 밤하늘을 두려움으로 바라보며,

함께 가는 길 1

 

 

아들이 붉은색 사인펜을 불안하게 잡고 무엇인가 열심히 그리고 있다. 이마엔 땀방울까지 맺혀 있다. 그리고 있지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우고 싶은 흔적 그리기다. 아빠! 부르는 소리에 맑은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자 자랑스럽게 그림을 내민다. 내 앞에 나타난 그림은 온통 붉게 물든 흡혈귀이다. 몽달 귀신이다. 외계인이다. 괴물이다. 잘 그렸지? 아빠를 그린 거야! 나는 그 곳에 없었다. 있었다. 없었다. 아빠가 이렇게 못생겼어? 아니! 이건 아빠 술 취한 모습이야! (!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난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의식들을 물어뜯고 싸워야 하는가!) 순간, 나는 비겁하게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마음 속 지우개로 나의 흔적을 지운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들키지 않게, 천천히, 봉두난발한 머리부터 지우고, 다음엔 구멍 뚫린 가슴, 다음엔 뼈다귀만 남은 팔, 다음엔 비틀거리는 다리를 다 지우고, 마지막 남은 발에서 지우개는 멈춘다. 발이 남았다. 이 발마저 지운다면……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발가락이 부끄러워 추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아들 모르게 양말을 찾고 있었다.

함께 가는 길 2

 

 

내 아들 이름은 호수다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카프카의 귀로 통한다

아들의 아버지는 이위발이다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발 대신 손으로 통한다

별명치곤 너무나 상징적이다

손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백미러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과거 또한 사랑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귀는 꾸밈없이 볼 수 있는 망원경이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인다

과거 또한 사랑에 구걸하지 않는다

오늘 나는 변신이란 책에 손을 베였다

자주 상처를 입는다

두꺼운 책보다 풀잎처럼 얇은 시집에

손은 더욱 잘 베인다

호텔 켈리포니아

 

 

모든 것이 녹아 내리는 어둠의

흔들림이 신음소리를 낸다

허기진 갈비뼈를 틀어잡고 우는 너

나뭇잎 사이로 죽음이 흔들린다

나는 두렵지 않다

너의 뜨거운 입김 속에 얼어붙은

내 살덩이는 건드리자마자 오그라든다

떼굴떼굴 굴러간다

가슴 한쪽을 떼어내

저 푸른 하늘에 풍선으로 띄우고 싶다

바보새가 되어 사라진 허공으로

훨훨 날고 싶다

숨이 막히면 언제나

그곳으로 똥파리처럼 날아가

너의 눈가에 내 초상화를 그리곤 했지

너의 타다 만 담뱃불 끄트머리에

철없는 딱정벌레로 붙어

다시 타들어 가길 기다렸지

내 가랑이 사이로

싱싱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발정 난 한 마리 고양이로

빛 바랜 독백 1

 

 

코쟁이들이 지적 소유권을 들먹이던 날, 나는 천원으로 양담배를 사서 공중으로 날려 버렸고, 그 돈으로 문고판 韓國人神話를 사 봤으면, 내 골통 속에 영원히 불꽃을 태웠을 텐데, 몇 개 남은 동전마저 으로 나올 빵을 사 먹어 버렸다. (不可分의 관계일까?) 뻐꾸기 울음 울던 똥차가 ! 대한민국의 노래로 바뀐들 달동네 하늘 가까운 변소에는 휴지로 사용될 빛 바랜 책이 사라지질 않는다.

 

느낌

 

 

바람 불어 좋은 날 첫사랑이 생각나 옥상에 오르면

빨랫줄에 널려 있는 하얀 와이셔츠는 배배 꼬여

탈색된 채 풀죽어 나와도 그 순백의 미소는

나를 신선하게 자극시킵니다.

 

바람맞고 돌아온 날 잃어버린 열쇠 때문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만능키를 철렁거리며

뛰어오는 열쇠 집 아저씨의 불그스레한 얼굴이

나를 신선하게 자극시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길을 걷다 무좀 걸린 발가락이

근지러울 때 나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여자의

긴 머리가 쏟아지는 폭포수 같아

나를 신선하게 자극시킵니다.

바람의 傳言

 

 

그녀는 아담의 딸이다 子宮이다

 

바람아!……오랜만에 만난 그녀 품은 따뜻했지만……웬일인지……그렇게……꼭 안기지는 못하겠더라……그녀는 너 소식 물었지만……난 한 마디도 말못했다……말이 안 나오더라……나오다가도 들어가더라……말하기도 싫더라……보고 싶던 그녀……저절로 눈이 감기더라……너 생각을 했다……눈을 못 떴다……그녀 몰래 눈을 떠보니 눈물을 흘리더라……그녀가 날 끌어안아도 난 모른 체했다……그녀는 잘 있더라……너는 그녀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살아야 한다……너한텐 미안하다……너 몰래 그녀 만나고 온 거……너가 알면 화를 내겠지……너 화내는 거 무섭고 싫지만……오늘밤엔 아무 말도 안 할란다……내일이라도 모레라도……너도 이젠 그녀 품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니!……바람아!

 

너는 이브의 아들이다 精子

 

세월이 흘러도

 

 

노파는 화장실에서 기저귀를 빨고 있다

옆에는 최첨단 탱크 세탁기가 위용을 뽐내며 버티고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노파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쥐새끼를 튀기고 있다

식탁 위엔 토비콤이 눈에 대해선 자신 있다는 듯이 앉아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노파가 응접실에 앉아 미숫가루를 빻고 있다

옆에는 미국산 이유식 버거가 뒹굴고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남대문 시장에서

 

 

여기는 민방위 본봅니다.

훈련 공습 경보를 발령합니다.

시민 여러분은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나는 반 토막의 늙은 동상을 보았다.

눈가엔 죽은 번데기가 붙어 있고, 뺨에는 검버섯이,

마디 없는 가죽장갑 손에는 동전 한 닢이,

타이어 잘린 신발 신은 채,

 

기우뚱대고, 절룩이고, 휘청거리면서, 무너지기 위해,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걷고 있었으나 멈춰 있었고,

정지해 있었으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흥남, 황포 돛대 바다 속으로 놓쳐 버린 동란이의

두 손을

어제도, 오늘도, 눈길이 마주치는 모든 것들 너머로,

두 눈에 묻어 있는 잿빛 그늘은,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민방위 훈련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각자 맡은 바 가정으로 돌아가

임무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설핏하니 해진 저녁 거리, 어느 가설 무대에 쳐진 몇 가닥의 선 위로 철 잃은 겨울비 내린다. 도시의 창들은 물살에 던져져 어릿거리고, 헤드라이트 불빛 따라 빗발이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자, 골목에 웅크린 어둠도 빛에 의해 구겨지고 만다. 찬바람이 모퉁이를 돌다가 미적대면, 크고 작은 건물이 반쯤 얼어붙은 빨래처럼 스걱거리고, 바람이 우산 밑으로 비를 몰아붙이면 차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슬픔이 넋을 잃고, 사람들은 몸을 말 듯이 웅숭거린다. 시간을 잃어버린 외곽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물기 젖어드는 시린 발끝으로 따뜻한 체온 그리워하지만, 기댈 데 없는 스산한 사람들 위로 겨울비 운다.

이유 없는 반항 죄

 

 

일상의 달이

여명을 타고 지친 고개를 숙이면

술래잡기하던 시간은

뛰쳐나온 달력 속으로 숨어 버리고

 

밤새 조각난 의식의 파편들이

손을 잡고 일제히 기지개를 켜면

시도 시 같지 않은 시가

꽃망울 터트리듯 터져 나올 때

 

책상 위에 하얗게 누워 있던

내 사각의 영토는 가슴을 열고

뜨거운 박수로 맞이했다

 

순간, 이유를 물어볼 틈도 없이

얼굴에 상처를 내고는 쓰레기 감옥에 처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며칠 후, 난지도에서 해방을 맞은 날

죄명이 밝혀졌다

!

유년에서 서울까지

 

 

유년이란 말의 의미를 몰랐을 때 나는 윗 마실에 사는 상급생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물론, 폭력이란 말도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그는 뒤통수가 깨지고 코피도 터졌지만 눈물만은 애써 감추었다 그날 그의 부모가 나를 찾으러 왔을 때 나는 이장 어른 댁 마굿간에 숨어 있었다

 

(그땐, 잡히면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 후, 그는 험악한 얼굴로 공수부대 베레모를 쓰고 마실에 나타났지만 이미, 나는 그곳을 떠난 뒤였다 하극상이란 말의 의미를 알았을 때 우연히 청량리시장 노상에서 빈대 잡는 약을 파는 약장수의 뒤통수에서 파랗게 뚫린 고향 하늘을 보았다

 

작품해설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위발 형의 등단작을 재미있게 읽고 어느 지면에서 한마디 한 것이 어느덧 8년 저쪽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형이 저한테 세 번씩이나 해설을 써달라고 간청하자 제가 무슨 제갈량이라고 더 이상 미룰 명분을 찾을 수 없더군요. 동시대에 태어나 시를 잃으며 세상을 읽고 또 쓰기도 하면서 우리는 80년대와 90년대를 통과했습니다. 비록 한 자리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마음 깊은 곳을 허문 적은 없지만 문단인 모임에서 만나면 서로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곤 했었지요. 형이 뒤늦게 문단에 나와 8년 동안 수확한 작품을 숙독하면서 저는 형의 유머 감각에 미소를 짓기도 했고 생활고를 접하고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세대적 공감대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같은 연배이지만 시세계가 참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시는 극적 구성을 갖는 것이 형식상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시집의 제목부터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입니다. 그리고 각 부의 제목을 제1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2희망사항하는 식으로 붙여 시집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요, 낱낱의 시가 연극 대본의 낱장으로 여겨지게끔 했습니다. 시와 인접예술과의 길 트기가 한창인 요즈음 이런 시도는 바람직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의 일부 같은 시는 80년대에 장정일이 시도한 바 있지만 편수가 많지 않아 몇 번의 실험에 그친 셈이었는데 형은 대단한 집념을 갖고서 시의 무대화와 영화화를 행하고 있어 주목하게 됩니다. 극적 구성을 꾀한 시를 훑어볼까요?

형은 마이크와 스피커 없이 무대에 나가 독백도 하고(무성 시대), 배경 음악 없이 내레이터의 목소리만 틀어놓기도 합니다(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무비 카메라로 법정 장면을 찍기도 하고(마지막 휴머니스트), 몇 개의 신(scene)을 정리해서 발표하기도 합니다(잠을 자고 있는 남자」「天上地上 사이). 연출 노트가 아니면 무대 장치를 위한 메모인 것 같은 시도 있습니다(어느 나른한 오후). 형은 객석에 앉아 극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도 씻김굿 구경도 하고(객석에서 바라보다1), 정신 병원을 무대로 한 연극도 관람합니다(객석에서 바라보다2). 한 편의 시 속에 오늘의 요리를 보여주는 방안의 흑백 텔레비전과 남색가가 달라붙어 집적대는 파고다극장 및 60년대 산골마을을 교대로 펼쳐놓음으로써, 즉 시각과 무대를 바꿈으 로써 시 ·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기도 합니다(오늘의 요리 개 같은 내 인생). 연작시시선들35번을 쓰신 것으로 보아 어떤 시각이냐 누구의 시선이냐 하는 것이 형에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인가 봅니다.

이밖에도 무대화를 꾀한 시는 상당수에 이릅니다. 형 나름의 전략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기존의 관습화된 서정시형에서 탈피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요. 아무튼 극적 구성을 시도하다 보면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구수한 입담이 펼쳐지게 마련이지요. 공간화를 꾀한 이야기라는 것은 상당히 구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관념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습니다. 영화나 연극이 재미가 있을 때, 다른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빠져 들지 않습니까. 극적 구성은 이와 아울러, 언어의 세공에 따른 시적 기교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어떤 풍경이며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요. 이를 통틀어 정황이라고 할까요. 정황 전개는 형 시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극적 구성과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인 셈입니다. 즉 독자가 내 시를 읽는 동안 어떤 관념을 갖지 말고 무대화된 풍경 내지는 구체적인 장면을 연상하라고 줄기차게 주문하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위에서 저는 형 시의 형식상의 특징이 갖는 장점을 밝힌 셈 인데, 희곡과 시나리오에 근접한 시들은 산문화가 다소 지나친 것이 아닐까요? 시다운 맛이란 역시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솜씨에 있을 터인데 시의 무대화 공간화 산문화를 강조하다 보니 눈으로 읽히기는 하되 음미하게끔 하지 않아 완성도가 떨어지는 시들이 혹간 보이곤 합니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유머 감각입니다. 극적 구성과 유머 감각은 면밀히 조화를 이루어 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두 가지 모두 강한 흡입력을 갖는 요소인데, 형이 유머 감각을 십 분 발휘한 시를 몇 편 골라봅니다.

 

-이미 난-오래 간다는 에너자이저 건전지를-새로 갈아 끼워야 할 곰 인형이 다 되어 있었어-손과 위-발이-붓고-떨리기 시작했었어

—「무성시대부분

 

아들의 아버지는 이위발이다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발 대신 손으로 통한다

별명치곤 너무나 상징적이다

손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백미러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함께 가는 길 2부분

 

강변 가설극장에서 정의의 외팔이를 보며 보낸 유년시절을 회고한 앞의 시는 독특한 자신의 이름자를 우스꽝스럽게 배치하여 이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그 시절부터 형은 객석에 앉아 있었던 게지요. 형은 별명이 이위손입니까? 손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백미러이고 나약하기가 풀잎처럼 얇은 시집에도 베일 정도이지만 발은 좀 다르지요. 발은 현실이라는 물살, 이른바 세파를 버티게 해주는 기둥 같은 것입니다. “내 발가락 하나도 세울 줄 모르던 나”(평생 동안 찾아보아라!)였습니다. 그러던 내가 비겁하게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음 속 지우개로 나의 흔적을 지워”(함께 가는 길 1) 나가다가 극적 전환을 시도합니다. 아들과 함께 가는 길이었지요. “마지막 남은 발에서 지우개는 멈춘다. 발이 남았다. 이 발마저 지운다면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발가락이 부끄러워 추워지기 시작한다.”고 했으므로 형의 이름 위발은 이나 이 아니라, ‘내지는 이 아닙니까.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발의 철학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름을 갖고 장난을 해 미안합니다.)

트럭 밑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다 죽은 사람을 놓고 살아남은 자들이 각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다룬 잠을 자고 있는 남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지상의 수많은 죽음이 필연이 아니면 우연이고, 의문의 죽음도 다반사이지요. 의문의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천차만별인데, 그 큰 차이를 찍은 형의 카메라 기법이 참신해서 좋습니다. 수입해온 애완용 동물 햄스터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풍자한시선들 3도 우스꽝스런 상황극입니다. 햄스터는 영화 속의 쥐처럼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함께 추구해야 할 생존의 최대가치인 자연의 질서마저, 물질에 현혹되어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너희들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정 난 몰랐었어라고. 이런 식의 뒤집어보기 및 패러독스는 형의 장기가 아닌가 합니다. 형은 시선들 4에서 고문의 일인자의 집에 들어간 바퀴벌레를 의인화시켜 우리의 적인 인간의 고문에 대하여 최소한의 양심도 보여주지 마라! 일상을 가장한 살의를 밥 먹듯이 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라고 외치게도 합니다. 바퀴벌레만 보면 고문을 하려 드는 인간이 한술 더 떠 타인을 고문해 먹고사는 자이고, 고문 피해자인 바퀴벌레가 그 인간을 성토하고 있으니, 고도로 세련된 우화시가 아닌가 합니다.

희극 내지 희비극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아마도 형이 직접 겪었던 일 가운데 곤혹스러웠거나 고소를 금치 못했던 일들을 시로 쓴 것일 테지요. 소금강 인근 마을에 갔다가 개도둑으로 몰려 도시로 압송되기도 하고(떠남과 돌아옴의 길 안에서), 하던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반품되어 돌아온 책을 갖고 이사를 다니면서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희망사항) 포장마차에 들어와 앉은 남녀 손님의 동문서답 식의 대화 내용이 시가 되기도 합니다(모가지 없는 그림자). 유년시절 윗 마실에 사는 상급생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는데 그가 공수부대 베레모를 쓰고 험상궂은 얼굴로 마실에 나타나기도 합니다(유년에서 서울까지). 극적 구성력과 유머 감각에 이야기 구사의 능력까지 구비했으니 시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요. 특유의 유머 구사에 사회 비판 및 인간 풍자가 이울러 행해졌더라면 어땠을까 히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형의 풍자는 어퍼컷이나 훅이 아니라 스트레이트나 잽입니다. 스트레이트도 잘만 들어가면 다운을 뺏을 수 있고 잽도 자꾸 맞히면 얼굴을 부어오르게 할 수 있지만 왠지 가벼운 느낌을 주는군요.

한편 형의 도시 체험 기록은 살벌한 전쟁터를 취재한 종군 기자의 취재 노트를 방불케 합니다. 시에서 간혹 고향운운 하시는 것을 보니 형은 갈데없는 촌놈인데, 그래서인지 도시 묘사가 아주 거칠고 난폭합니다. 도시에 나와서 겪은 숱한 일들이 마음에 상처를 주었기에 이런 거친 표현들이 나오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몇 대목 예를 들겠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요령 소리

두부 파는 아저씨 사라지자,

看守罪囚 부르듯이 2848 이판사판

차 빼 달라고 못 빼겠다고 악을 써대면

하품 소리, 철문 여닫는 소리, 엔진 소리,

도시의 아침부분

 

즐비한 여관 골목 쓰레기통 옆에서 허연 뱃속을 드러내 놓은 불어터진 밥알이 얼음 속에 갇힌 미라가 되어도 젖가슴 만한 하얀 비닐봉지 사이를 뚫고 삐어져 나온 흐물거리는 콘돔이 티슈에 싸여 나뒹굴어도

겨울 밤 쓰레기통 옆에서부분

 

산란중인 물고기 내장 터진 듯 살벌한 도시에

오늘도 어김없이 봄비는 주거니 받거니

선택부분

 

나와 내 그림자는 세기말의 도시가 黃砂에 갇혀 버린지도 모른 채, 손바닥 뒤집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손이 칼인 양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찌르기 시작했어, 그러다 갑자기 동시에 우는 거야, 미친듯이,

달의 몰락부분

 

이런 시를 보니 형이 파악한 도시는 인간성이며 도덕성이 죄다 무너지고 만 악을 써대는”, “살벌한공간입니다. 나눔의 미덕은 온데간데없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 되는 도시에 대한 환멸감에서 형은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모르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이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그저 내 한 몸의 욕망 충족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내달리는 세기말의 도시는 현대판 소돔성인 게지요. 형은 어느 날 저녁, 비 내리는 거리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비감한 마음으로 시상을 떠올렸나 봅니다. 이웃의 꿈을 돌봐주는 곳이 아니라 꿈을 갉아먹는 곳 사람의 희망을 키워주는 곳이 아니라 좌절만을 맛보게 하는 곳. 이런 도시에서 내 평생 살아가야 하나 식솔 이끌고 귀향해야 하나.

 

도시의 창들은 물살에 던져져 어릿거리고, 헤드라이트 불빛 따라 빗발이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자, 골목에 웅크린 어둠도 빛에 의해 구겨지고 만다. 찬바람이 모퉁이를 돌다가 미적대면, 크고 작은 건물이 반쯤 얼어붙은 빨래처럼 스걱거리고, 바람이 우산 밑으로 비를 몰아붙이면 차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슬픔이 넋을 잃고, 사람들은 몸을 말 듯이 웅숭거린다. 시간을 잃어버린 외곽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물기 젖어드는 시린 발끝으로 따뜻한 체온 그리워하지만, 기댈 데 없는 스산한 사람들 위로 겨울비 운다.

버스를 기다리며부분

 

겨울비 내리고 있는 도시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따뜻한 체온기댈 데입나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따름이지요. 타인과 도무지 감정의 교류를 가질 수 없고 가족과도 혈연의 정을 나눌 수 없을 상태가 장기화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외로움은 우리를 정신병자가 되게 하는가 봅니다. “상태는 심각합니다/절대안정이 필요합니다/의사의 말이 오진이 아니라면/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먼저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삶의 무게는 한 개의 토큰으로 추락한다)는 형의 하소연이 저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시에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으면 이런 시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도시를 떠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 많은 도시에서 느끼는 일종의 광장공포증,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감, 꿈을 앗아가는 도시에 대한 환멸감은 문명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시뮬레이션하면 가상전쟁이나 도상전쟁을 떠올리게 되는데, 형의 시뮬레이션연작시 9편은 무슨 의도로 쓴 것들인지 궁금합니다. ‘전자오락만 해도 벌써 낡은 용어가 되고 말았지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게임을 생각해봅니다. 컴퓨터로 할 수있는 게임이란 것은 이제 오락의 차원이 아니지요. 우리의 의식을 뒤바꿔놓은 혁명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고 피카츄와 디지몽 같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겸 캐릭터 산업은 이 나라 거의 모든 어린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지요. 일본 패션 잡지가 청소년의 기호를 좌우하고 무라키미 하루키가 이 땅 독서대중의 여가를 빼앗은 것처럼 말입니다. ,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락실이나 PC방에서 신명이 나 파괴하고 죽이다가도 게임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현실에서도 가상세계에서의 전장 속을 헤매는 것이 몇 해 전부터 큰 사회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 동생을 도끼로 찍어 죽이곤 사람을 실제로 죽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형의 시를 봅시다. 시집의 첫 번째 시를 시뮬레이션 1로 삼았고, 3막의 앞쪽 8편이 같은 제목의 연작시이니 영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눈알이

떠돌아다닌다

날아다닌다

줄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한 점이다

눈을 던진다

버린다

그곳이 유배지다

(중략)

눈을 뜨고 태몽을 꾼다

나는 짝눈이다

시뮬레이션 1부분

 

시가 무섭군요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이런 시는 주제의 깊이를 추구하거나 각종 비유법 등 표현의 신선함을 무기로 삼는 보통의 서정시와는 아주 다릅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극적 구성을 보여준 시들도 그렇지만 시단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거리를 확실히 두려고 하는 형의 집념이 보이는 시편이로군요. 이런 시에서 형은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고 독자가 보고, 느끼게 합니다. ‘들려주는 시가 아니라 보여주는 시는 그 옛날 이미지즘 주창자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이었습니다.

 

그림자 하나가 코카콜라를 물고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누워 있다

대굴대굴 뒹굴고 있다

화면 밖의 얼굴이 비웃고 있다

시물시물거린다

입가에선 검은 피가 흘러 내린다

안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임의 법칙이다

불도저 소리 포크레인 소리 크레인 소리

아파트가 절단되고 있다

하늘이 콘크리트로 덮여 있다

(중략)

코드가 끊어진 동굴 속이다

더럽게 더운 날이다

시뮬레이션 2부분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네 가지를 연상했습니다. 첫째 컴퓨터 게임, 둘째 첨단 폭파 기술을 갖고 하는 도시의 낡은 건물 파괴, 셋째 걸프전, 넷째 스타워즈 같은 미래의 전쟁. 형은 전쟁을 게임이라도 하듯이 하게 될 미래의 전쟁을 담은 영화를 보고 와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닙니까? 상륙작전 대신 미사일의 수로 전세가 판가름되는 오늘날의 전쟁이니 시뮬레이션으로 미리 해보면 몇 명 사망에 몇 명 부상, 며칠 만의 전쟁이라는 것도 수치로 곧바로 나올 것입니다. 여타의 시뮬레이션연작은 미래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가상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꿈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거의 전부 최근 들어 유행어가 된 엽기적인여러 장면을 보여주고 있어 가슴이 섬뜩합니다. 형은 미래사회를 상상하여 보여주되 청사진이 아니라 앙상한 뼈마디가 보이는 방사선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혹 문명의 종말적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까? 형은 능력만 된다면 공포영화의 감독이 되어 비인간적이고 몰상식적이고 반문명적인 현실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사람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이런 시들에 대한 평단의 무관심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이번 시집의 시적 화자나 대상 인물이 시인인 경우가 많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한때 소설가가 소설 쓰는 일의 고뇌를 곧잘 다루어 소설가 소설이라는 비평적 용어를 등장케 했는데 형은 시인 시를 쓰고 있는 듯합니다. 당연히 자전적인 스토리가 곧잘 전개되지요. 수난을 겪는 이는 거의 전부 형 자신을 모델로 한 시인입니다. 형이 한때 그러했겠지만 시인은 실업자 내지는 생활무능력자입니다.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을 세상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이해를 못할 정도가 아니라 멸시하고 죄인 취급을 하지요. 형은 천안역 5킬로미터를 벗어난 지점 건널목에서 달리는 서울행 급행열차를 철로 위에 서서 정지시킨 시인이 살인미수죄와 국가전복죄로 몰려 법정에 선 희한한 상황을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직업도 재산도 없는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이 가엾은 시인에게 무거운 죄의 굴레를 씌운 다는 것은 우리들 양심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휴머니스트부분

 

이러한 변호사의 말에 검사는 엄벌로 다스려야 된다고 주장하고, 시인은 저의 돌출된 행동이 후세들에게나마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최후 진술을 하지요. 재판장은 시인이 오만불손하게 법관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이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인 불안감을 조성했다고. 손해배상 10억 원을 지불할 것을 선고하면서 이를 이행치 않을 시에는 감옥에서 하루 2만 원씩 5, 000일을 노동으로 대처하라고 합니다. 그 선고에 시인은 체념한 듯이 고개를 떨구지요. 이 법정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 독자적 현상설중 오늘날 시인 이 처한 운명은 아무래도 전자가 아닐까요. 하지만 형은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이 된 연유, 시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나 세속도시의 윤리를 거부하고 휴머니스트로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이 문맥 속에는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형에게 시인은 곧 휴머니스트인 것입니다.

이 시집에는 거울이미지와 ()’, 이미지가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도 시인으로 살이가는 일의 어려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울이 나오는 시는 어느 모노드라마 의 생」 「거울 속에는」 「그대는」 「시뮬레이션 3」 「시뮬레이션 4」 「시뮬레이션 8등이고, ‘가 등장하는 시는 떠남과 돌아옴의 길 안에서」 「오늘의 요리 개 같은 내 인생」 「天上地上사이」 「개와 고양이」 「개꿈」 「겨울 밤 쓰레기통 옆에서등 입니다. 거울은 생활인과 시인의 갈림길에서 늘 갈팡질팡하는 나를 비추어주며, 생활이 너를 속일지라도 시를 계속 써야 한다고 충고하는 존재입니다. 개는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 제목을 부제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 개와 같은, 혹은 개만 도 못한 취급을 받는 시인을 빗대기 위해 자주 등장시킨 것 아닙니까? 시에 대한 형의 열망을 저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었지요.

 

밤새, 입과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빨아대던

타다 만 꽁초 옆엔 늙은 창녀의 음부처럼

널브러져 있는 구겨진 원고지.

도시의 아침부분

 

밤새 조각난 의식의 파편들이

손을 잡고 일제히 기지개를 켜면

시도 시 같지 않은 시가

꽃망울 터트리듯 터져 나올 때

 

책상 위에 하얗게 누워 있던

내 사각의 영토는 가슴을 열고

뜨거운 박수로 맞이했다

이유 없는 반항 죄부분

 

도대체 시가 무엇이기에 밤을 새워 담배를 피우며 쓰게 합니까. 형이나 저나 무엇에 단단히 씌었기에 이 길로 들어서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간난고초의 길이요 형극의 길이지만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 없고 격려해주는 이는 더 더구나 없고...... 그러기는커녕 그 따위로 쓰느냐고 욕이나 해대고 말입니다. 하지만 형이나 저나 이것밖에 사는 낙이 없고 인생의 보람이 없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저도 형처럼 그저 틈만 나면 시상을 떠올리고 메모를 하고 초고를 정리합니다. 남의 시집이며 평론집을 부지런히 읽으며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결과는 늘 나 자신을 참담케 하는 시라는 오묘한 것.

 

독립된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그대와 결합될 때 고독하다.

시는 시어의 거울을 벗어날 수도 있다.

사물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한,

 

그대가 고향을, 고향이 그대를 버릴 때 고향은 침묵한다.

시는 시어의 고향을 벗어날 수 없다.

떠남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는 한,

 

뒤집어져 버려도, 그대가 안과 밖을 구분 못할 때 절망한다.

시는 시어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패러독스와 리얼리티가 공생하는 한,

 

왔다 사라지면, 두렵고, 찰나

서글프게,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시는 시어의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

시의 가슴이 가슴으로 남아 있는 한,

그대는전문

 

이런 시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이 시대 시인이 처한 운명에 대해서는 일찍이 보들레르가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된 거대한 날개의 바닷새 알바트로스에 빗댄 바 있고, 베를렌느는 저주받은 시인들이라고 탄식했었지요. 그들이 그러했듯 형 역시 시인됨의 운명이 비극일지라도,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줄곧 자존심 구겨질지라도,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지사 시인의 길을 걸어가는 바에야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시보다는 단 몇 사람에게라도 큰 공감 내지는 깊은 감동을 주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요? 이 점, 형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형의 말마따나 시는 시어의 고향과 질서를 벗어날 수 없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시어의 거울과 공간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듣고 한바탕 웃은 뒤 금방 잊어버리는 재담이나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 아닐까요. 코끝을 찡하게 하는 시, 가슴을 벅차게 하는 시, 무릎을 치게 하는 시, 암송하고픈 시, 필사해 두고 싶은 시, 오래 잊혀지지 않는 시...... 이런 시가 좋은 시라고 한다면 형이 앞으로 지새워야 할 밤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자학의 나날이겠지만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의 나날이기도 하겠지요. 저는 형의 시 그대는을 가슴에 새기고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이 도시의 밤에 또 발걸음을 재촉하겠습니다.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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