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집<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1부~2부/2014년 출간/천년의 시작

2023. 7. 26. 14:05이하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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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이 위 발 시집

 

 

 

 

 

 

 

 

 

 

 

 

 

 

 

 

 

시인의 말

 

첫 번째 시집 출간 이후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보낸다.

평생 시집 세권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제 한권의 시집이 남았다. 언제 출간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이 시집이 존재적 욕구로부터 해체해 놓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대상에 대한 동일성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나의 정체성과 그 증거를 위해 말들이 성성한 이 시대에

또 다른 의미의 나무가 되길...

 

-이하 松霞詩舍에서

 

 

 

 

 

 

 

 

 

 

 

 

 

 

 

 

 

 

 

 

1

 

그대 떠난 빈자리에

바다의 전설

애월에서

복사꽃

걷는 다는 것은

숨어들다

바람에 의해 아름다워지는 너

땅을 딛고 있는 발끝에서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상처, 그 외로움에 대하여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꽃들의 생각

나무를 바라보며

 

2

 

그곳에 가면

슬픔이란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그림자

적요에 눈을 뜨다

별리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개망초

바라보기

인생

그곳을 찾아서

그대에게 묻고 싶다

그 길에 눕고 싶다

잔상

어느날 오후

 

 

 

 

3

 

비와 나무 사이

슬픔이 뭔지 모르는 그대에게

착각

틈과 틈 사이

술 한 잔

질투

그대 잘 계시는지

봄날은 간다

생각, 생각, 생각

, 길을 따라

풍문

일월산

각시탈

화두

 

4

 

자두나무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빈집

여우 굴

기억의 집

상주의 미소

보고 싶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송어는 알고 있다

함정 1

함정 2

함정 3

그대의 등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1

 

 

 

 

 

 

 

 

 

 

 

 

 

 

 

 

 

 

 

 

 

 

 

 

 

 

 

 

그대 떠난 빈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 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이며

어떻게 우리들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바다의 전설

 

 

놀도 스러져가는 바다는 자욱한 어둠에 잠겨

갈매기는 바람에 쫓기듯 가쁜 날갯짓으로 날고

파도는 선창 발치에 악어 이빨처럼 몰려왔다 밀려가고

저 혼자 물결을 세웠다 엎으며 뒤척인다

산허리로 빠지는 인적 끊긴 자드락길엔 억새가 울고

바다에서 시작된 바람이 일렁거리자 서산에 걸린 햇살마저 붉어

순결한 사랑이 소멸되면 파도처럼 생성되긴 힘들다

맑은 햇살아래 바다는 앓는 짐승이 되자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장걸음으로 대숲에서 나와 바다의 어둠을 보지 못한 채

집어등의 불빛만 쏘아 보고 있다

 

 

 

 

 

 

 

 

 

 

 

 

 

 

 

 

 

 

 

 

 

 

애월에서

 

 

 

길을 걷는 다는 것은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애월담 등나무 사이로

몰락하는 붉은 해가

더 슬퍼지는 것은

술잔에 떨어지던 달의

전설 때문이라고

석양에서 온 풍문이

낮달처럼 가슴으로 파고들면

당신을 위해 눈물을 적시고

있는 그대는

이백의 그림자인가

 

 

 

 

 

 

 

 

 

 

 

 

 

 

 

 

 

 

 

이마 색깔에 따라

먹꼭지나 홍꼭지라 불러보고

반달 모양의 표지가 붙어 치마 양 귀퉁이에

갈개발이 나부끼던 파란 겨울 하늘 바라보며

대추나무 위로 날리던 가오리나 나비처럼

구멍 없는 네모난 방패는 약간의 실수에도

곤두박질하며 땅에 꼬라박는데

구멍 뚫린 것은 어설프지만 잘도 나는데

왼쪽이 기울면 오른쪽 갈개발을

오른쪽이 기울면 왼쪽 갈개발로

이마에 있는 살은 조일수도 풀 수도 있지만

아무리 못났어도 중심을 잡아주면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묘기를 부리는데

계산이 안 맞아도 움직일 수 있는

네모난 가슴 한복판에 둥그런 구멍 하나쯤

뚫을 줄 알았던 너

 

 

 

 

 

 

 

 

 

 

 

 

 

 

 

 

 

복사꽃

 

 

 

복사꽃이 풍기는 요요작작한 기운 때문에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음탕한 무녀들에 둘러싸인 것 같은

이승과 저승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네

복사꽃밭에 들어서면 세상은 수백 만 마리 벌들이 잉잉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아기 울음소리로 들렸네

그 소리에 바닥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정신의 射精을 하고 말았네

 

 

 

 

 

 

 

 

 

 

 

 

 

 

 

 

 

 

 

 

 

 

 

 

 

 

 

 

걷는 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생각으로 다가올 때

내 눈은 게을러도 좋아 책임 지우지 않아도 좋아

수평이 되어 있을 때나 수직이 되어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의자에서 보내는 삶이 원숭이인지 인간인지

앉은 자세로 생각할 때 생각은 엉덩이가 하고

본성은 수용적이며 평화적일수도 있지

다리를 뻗을 때처럼

 

 

 

 

 

 

 

 

 

 

 

 

 

 

 

 

 

 

 

 

 

 

 

 

 

 

숨어들다

 

 

 

전등이 밤을 몰아 낸 줄 알았더니

밤은 사람의 가슴으로 숨어 들어가

지우기 어려운 어둠이 되었다는 생각

세상의 어둠은 빛 앞에서 소멸이 아니라

보다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다는 생각

 

한권의 책으로 내 옆에 누워 있는 그림자

 

 

 

 

 

 

 

 

 

 

 

 

 

 

 

 

 

 

 

 

 

 

 

 

 

 

 

 

바람에 의해 아름다워지는 너

 

 

 

 

너의

입술이 열리는 동안

귓바퀴 사이로 바람이 꼬물꼬물 들어와

신발 코처럼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키 너머로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들이

배꼽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듯

쭉정이는 밖으로, 알찬 것들은 안으로 들어와

너의 말, 너의 몸짓, 너의 눈빛, 너의 음성이

합궁하듯 긴장감이 팽팽할 때

시계 소리는 상쾌해지고

먹이를 통째로 삼킨 뱀이 여유 부리며

시간을 들여 되새김질하듯

바람을 일으켰다 잠재우고

파란하늘에 싹이 트는 꽃씨에

꽃망울 터지듯 눈물겨워지는

너는

 

 

 

 

 

 

 

 

 

 

 

 

 

 

 

 

 

 

땅을 딛고 있는 발끝에서

 

 

 

해변의 모래톱에 찍힌 흔적들 위에 앉아 있던 물새와 몸을 숨긴 조개들, 모래판 같이 부드러운 그 위를 손가락처럼 딱딱하고 뾰족한 것으로 긁어야 하는 것이 글이라면,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호랑이가 나무 등걸을 발톱으로 자국을 내듯이, 우리가 만들어낸 최초의 붓이 손톱이었다면, 그것이 뼈나 나뭇가지가 되고, 오래 간직하기 위해 돌 위에 새겼듯이, 펜에 힘을 주고 쓰면 종이는 찢어지게 되고, 쓰는 것이 아닌 긁는 것으로 흔적을 보여 줄 수가 없듯이, 찢어지는 법이 없는 섬세하고 오묘한 정신의 리듬까지, 부드러움을 잡은 손이 움직이려면 어깨에 힘을 주어야 하고, 어깨에 힘을 주려면 가슴에 힘을 주어야 하고, 가슴에 힘을 주려면 허리에 힘이 있어야 되고, 허리힘을 받으려면 떠받치고 있는 발끝이 땅을 딛고 있어야 하듯이, 긁는 것이, 찍는 것이, 새기는 것이, 쓰는 것이, 붓이라면...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열차를 타고 달리는

사라진 그대 앞에서

겸허하게 고개 숙이듯

당신의 끌림에

짙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을

빨아주고 싶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눈으로

보기 싫어서

 

 

 

 

 

 

 

 

 

 

 

 

 

 

 

 

 

 

 

 

 

 

상처, 그 외로움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기도 하는

슬픔의 까닭이 결핍이듯이

결핍이 없는

나의 시선은

균형을 잃고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대는 표면과 이면의

양날을 품은 채

눈꺼풀이 커튼 열리 듯

달덩이 하나 쑤욱 올라와

보란 듯이 바람맞은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하는데

 

 

 

 

 

 

 

 

 

 

 

 

 

 

 

 

 

 

 

 

상처, 그 가치에 대하여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겨 봐도 옷 젖는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 푸른 산을 걸어 봐도 다리가 아픈 것은 아니지만

 

상처에 상처를 내면 상처가 아니듯이

 

 

 

 

 

 

 

 

 

 

 

 

 

 

 

 

 

 

 

 

 

 

 

꽃들의 생각

 

 

 

꽃잎 한가운데 샛노란 수술을 달고

마치 접시에 황금빛 촛불을 밝혀 놓은 듯

그 꽃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면에 투영된 그림자가

꽃을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

물속의 그림자가 주인인줄도 모른 채

꽃들이 그림자를 흉내 내고 있는지

그림자가 꽃들을 흉내 내고 있는지

세상은 한 벌이 아닌

두 벌이 있다는 생각,

 

 

 

 

 

 

 

 

 

 

 

 

 

 

 

 

 

 

 

 

 

 

 

 

 

나무를 바라보며

 

 

 

나뭇가지에 붙어 멈춰 있는 듯

움직이는 달팽이

잠시 한눈파는 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들은 뱀처럼 꿈틀 거리고

나뭇잎들은 날름거리는

뱀의 혓바닥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무를 향해 미련한

몸짓으로 버둥거려 보지만

지나온 것들과 앞으로 마주칠 것들이

닮은 데가 있듯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별이

오래전에 죽은 별일 수도 있음을

뒤로 한 채

떨고 있는 너

 

 

 

 

 

 

 

 

 

 

 

 

 

 

2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물처럼 잡히지 않고

때론 부드러워

미끄러지는 바다가 있다

가슴을 열면

팽팽한 가야금 현이 되어

돌처럼 무겁던 귀가

어느새

동백꽃으로 열리고

내가 만났던

파도를 닮은 사람들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떠돌이 개

갈매기를 삼킬 듯이

솟아오르던 붉은 등대

청어처럼 누워 있던

등푸른 방파제

적당한 바람과 넉넉한 햇살로

소설 속 첫 문장처럼

잘 버무려진

그곳에 가면

아직도 남아있는

마지막 여분의 미소

 

 

 

 

 

 

 

 

 

슬픔이란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문틈 사이로 침입한 불빛이 쇠스랑처럼 박힐 때, 지네가 기어가듯 등골이 서늘한 그대의 몸은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풀어지고, 소년은 머리칼에 묻은 안개를 털어 내면서 몰래 눈물을 훔친다.

 

냄비에 달달 볶은 게처럼 소년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고, 애써 웃음 짓던 액자를 떼어놓은 빈 공간엔 하얀 손수건 한 장이 달랑거리며 문풍지 바람에 날려 강물처럼 흘러간다.

 

핏빛으로 젖은 나무가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던 기운을 내뿜을 때, 소년은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살을 상처인 냥 떼어내듯 하늘도 얼룩덜룩 피어난 하얀 곰팡이를 지우고 있다.

 

계절이 덤불의 쭉정이를 따라 바뀌듯 바람은 허연 침을 흘리며 텅 빈 방안을 핥아대지만, 작은 떨림을 믿고 새벽을 꿈꾸며 나비잠을 자는 소년 머리 위로 이파리 하나가 팔랑대고 있다.

 

 

 

 

 

 

 

 

 

 

 

 

 

 

 

 

그림자놀이

 

 

 

당신은 그림자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와

내 가슴에 깊숙하게 드리워 놓고

내보다는 당신 그림자가 더 황홀하다고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보려고 하지만

 

연꽃보다는 연꽃의 그림자가

대나무보다는 대 그림자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림자는 숲 뒤편에 있고

향나무가 디디고 선 뜰아래에 있고

강물에 있고 내 마음속에 있고

그림자 속에 달이 있는데...

 

 

 

 

 

 

 

 

 

 

 

 

 

 

 

 

 

 

적요에 눈을 뜨다

 

 

 

그대 안에서 몸을 열었던 단청 위로 다시 안개가 내립니다. 일상의 조각들을 그대로 묻어 둔 채, 아득히 멀어져 가는 풍경의 울림이 꼬리를 물고 새벽하늘과 맞닿을 때, 그대의 눈에선 하늘로 향하는 산 너울이 꿈틀거립니다. 닿아 있는 그 자리에서 수평선은 적막으로 굳어가겠지만, 익사한 혼돈은 희뿌연 가루를 둘러 쓴 서리처럼 상처를 덮어준 채, 가시나무에 손발이 베여도 도마뱀처럼 사지를 뒤틀며 절벽의 탑 위로 올라갑니다. 시간의 바람이 그대를 스쳐지나가도 시선은 시간의 적요에 눈을 뜹니다.

 

 

 

 

 

 

 

 

 

 

 

 

 

 

 

 

 

 

 

 

 

 

 

 

 

 

 

별리

 

 

 

 

가을나무에선 빗방울이

황소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데

슬픈 예식을 치르듯 먼 길을 떠나는 나에게

너는 숲속이 안방인 냥 꿈을 꾸듯이 미소만 짓고 있느냐

한 땐 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저 강의 팔자가 부러웠지만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을 바꾸듯

우리 또한 인연 따라 움직이는 것을

채찍 같은 가을비가 숲을 때리고 있는 지금

햇빛이 소름끼치도록 환한 이유가

너의 눈물이란 것을 나는 몰랐었네.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빛이 있고 없는 그 사이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그대는 언덕 아니면 강물인 것을

점점이 박힌 그 길 위로

석류꽃은 떨어져 화전이 되고

불두화는 이슬에 젖고

옥잠화는 눈에서 깨어난 듯 맑은데

아름다움마저 슬픔과 맞닿아 있어

슬픔의 까닭이 결핍이라면

결핍이 없는 아름다움도

그대의 시간 속으로

숨어

버린다면

 

 

 

 

 

 

 

 

 

 

 

 

 

 

 

 

 

 

개망초

 

 

 

 

구절초도 아닌 것이

쑥부쟁이도 아닌 것이

아버지 상여가 밟고 간 밭두렁에도

지천으로 피어나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배다른 누이처럼 구박받던

멀쩡하던 것도 몹쓸 것이 되고

모두가 헛되고 헛되듯이

하잘 것 없이 뭉개져 버리는

개소리, 개꿈, 개떡, 개죽음 같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운 구석 하나 없는데

달밤에 하얀 꽃밭 위를 지나가듯

사람의 손길이 잠시라도 뜨면

언제 들어갔는지 자신의 터를

제 집으로 삼아 버리는

의미 없음에도 존재하는 엄연함에

 

 

 

 

 

 

 

 

 

 

 

 

 

 

 

바라보기

 

 

 

쪼그려 앉아 바라보면

주변 풍경이 달라 보이듯

건널목 앞에 기다리며

멀거니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신호등 쳐다보는 마음이

조급해지진 않았는데

나와 상관없다던

담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아카시아 향기는 숨어 있던

도둑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 향기에 취해 두리번거리는 사이

강을 따라 올라가던 유람선이

꽃상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동네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입간판이 우울해 보이는 것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이지만

작아서 보잘 것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있어도

모른 척 시치미 떼고 느끼는

감정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늘 가까이에 있는

앉은뱅이꽃도 보지 못하는

 

 

 

 

 

 

 

 

인생

 

 

 

 

오늘을

괄호 안에 넣어보고

풀어보고, 지워보고

내일을 위해 찝쩍거려 보지만

낮달 말뚝에

박혀 있는 소 한 마리

소의 목엔 올가미가 걸려있고

그림자는 올가미 끈이

베푸는 괄호까지만

돌고

돌고 도는데

 

 

 

 

 

 

 

 

 

 

 

 

 

 

 

 

 

 

 

 

 

그곳을 찾아서

 

 

 

그곳에 시간이 스며들면 영원히 미끄러지듯 슬픔이 여름 하늘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먹구름처럼, 어슬어슬한 푸른 새벽 이명이 되어 그대의 눈빛 속으로 새파랗게 날선 불빛으로 파고들 때, 내 발은 꿈에 붙들려 물처럼 잡히지 않았다.

 

나를 봐! 내가 잡히지?

허우적대는

그리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시든 분꽃처럼

스산하게 웃고 있는

너를 봐!

시간은 만져지지 않고

비누처럼 미끄러지기만 하지

너의 발자국은

변함없이 물이 되어

흐르고

가둘 수 없는 빛으로

꽃들이 하나도 없이

황량한 도로 위에

하늘이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하며

네가 가진 시간 속의

눈빛이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그 길에 눕고 싶다

                                                                                

 

 

비밀을 삼키고 잠들어 있는

그 길은 한쪽 발을 담근 채

어둠 속이지만 새파랗게 날선

낫의 눈처럼 빛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길한 떨림처럼 미세한 파장이

공기를 타고 묵직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마를 묻고 잠들어 있는

그 길을 안고 떠나야 하지만

팔이 없고 다리마저 없이

시치미 떼고 하얗게 엎드려

여전히 위협적인

그 길에 눕고 싶다

 

 

 

 

 

 

 

 

 

 

 

 

 

 

 

 

 

 

 

 

잔상

                                                                    

                                                                      

 

곱기도 해라

탐욕의 속성으로

햇살을 빨아들이는

붉은 등

 

매화의 꽃샘은

잎 새 끝에

매달려 낙화를

꿈꾸고

 

벽화에 박힌

겨울의 잔상은

휘청거리듯 어지럽게

그네를 탄다

   

 

 

 

 

 

 

 

 

 

 

 

 

 

 

 

 

어느날 오후

 

 

 

장미가 거품처럼

붉게 흘러내리는 날

벌 한 마리가 일직선으로

장미를 향해

날아가고

나비는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다가 꽃 위에

앉는데

불꽃처럼 곱게

흘러가던 수련도

터질 것 같은

두려움에

뿌리가 안개에 덮이면

뿌리가 자라

커지는지도 모른 채

비처럼 침만 흘리고 있는

어느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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