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집<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1부~2부/2021년 출간/시인동네

2023. 7. 26. 14:25이하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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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

 

이위발 시집

 

 

 

 

 

 

 

 

 

 

 

 

 

 

 

 

 

 

 

 

 

 

 

이위발

1959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3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 평전 이육사가 있다. 현재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mail: weebal2004@hanmail.net

 

시인의 말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상징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며 한 편의 시다.

떨림을 위해 그 찰나를 잡으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이제는 마음으로, 몸으로, 눈으로 쓰며 살고 싶다.

 

 

20214

이위발

 

 

 

 

 

 

차례

 

시인의 말

 

1

 

문은 시선이다

경계

겨울의 반전

너의 변명은 참이었다

익지 않고 사는 법

가능성

버틴다는 것은

소리 없이 기어드는 이방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낙타와 고삐

기다린다는 것은

필론의 돼지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치명적인 것은 어둠에 묻혀 있다

TV를 보면서

 

2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선을 넘어서는 순간

지하철 2호선

오필리아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

사바세계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편견

꽃의 세상

미안해, 미안해

기다리며, 싸우며, 잡는 법

사나이 눈물

당나귀가 바라보는 세상

꽃길

그저 그렇게 사는

그림자의 자세

있음과 없음의 사이

3

 

한 가지 시선에 대한 오류

달과 장미

그녀의 이름은 구름이었다

슬픔의 길

당신은 떠났지만 떠난 것이 아니었다

겨울밤을 보내며

너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금낭화

그때 그 시간

그 길은 안개였다

그린다는 것은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섬은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본질이다

 

4

 

경지에 오른 사내

축산 할배와 워낭

시간놀이

풍경

검정 고무신

문답

어쩔 수 없는 선택

봉선화

상사화

고백

제망매가

걸어가는 길

과대포장

빅뱅

우는 나무

 

해설 주병율(시인)

1

 

 

 

문은 시선이다

 

 

 

그는 기차를 타고 있다. 문 너머 퍼즐 조각 같은 자잘한 논과 밭이 보인다. 식칼 같은 햇볕이 문틈으로 깊숙이 찔러 들어온다. 햇볕이 땅을 밟고 있는 시선과 마주친다. 그는 문의 시선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서로 다른 문이 마주 보고 있는 길이 보인다. 문이 닫히면 문 뒤로 손 흔드는 사람 보이고, 열리면 보이질 않는다. 문이 열리자 회색빛이 너울대는 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 웃음을 참는 사람이 허그를 하고 있다. 문이 등을 보일 때는 우는 사람 내보내고, 가슴을 내밀 때 웃는 사람 내보낸다. 그는 문 등에 올라탄 것도 아닌데, 흙을 밟은 것도 아닌데, 그는 한번 열리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앞에 서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처럼.

 

 

경계

 

 

 

경계 위로 줄타기 하듯

너의 짓궂음에 악의가 깃들어

관계를 허물게 되고

가볍게 신경을 건드리는 너의 행위는

복수심을 유발하거나 관심의 정도를

깊어지게 하고

악의가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건

짓궂음을 받아주는

너의 경계 때문이지만

어린 매화나무 속에

늙은 매화나무가 들어 있다는 말

너 속에도 들어가 있고

내 속에도 들어가 있는

어머니의 주름과 흰 머리칼에도 들어가 있는

밖에서만 찾으려 하는

허깨비 같은 눈빛들

 

 

 

 

겨울의 반전

 

 

 

상처는 만질수록 커진다고 누가 말했다. 사물의 맨 끝이 아픔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번들거리는 요기로 벗은 몸을 할짝거리는 달빛은, 어릴 때 발에 채이던 돼지 불알처럼 팽팽하게 달려오고,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반복되는 일상에, 머리를 자른다고 슬픈 마음까지 자를 수 없기에, 고요한 쉴 곳을 가지고 싶어,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세상의 괴로움을 안아야 한다기에,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몸도 따라가지 않듯, 노을을 보며 꿈틀대는 뿌리를 의식하는 것이 필연이라면, 섹스는 잠시 밀려오는 아슬아슬한 허무감이겠지, 싱그러운 마음을 비추는 것이 부드러움에 스며들고, 굵은 눈발이 어깨에 앉을 때마다 꽃잎이 투욱 하고 떨어지듯, 누리고자 품는 방식이 은유적이라면, 이 망할 놈의 햇빛 곱기도 해라!

너의 변명은 참이었다

 

 

 

1

혼자 있으면 별로 심각해지지 않는 너는

혼자 있을 때도 심각해지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바지 앞지퍼를 열고 다니는 그 틈 사이로 황혼이 우습게 스며들기도 했지만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자는 모습에 오줌이 마려워 엉덩이를 실룩거리기도 했었지

 

2

너는 그들의 얼굴을 구기고 싶다고 했었지

옅은 어지럼증이 연기처럼 흩어지듯 참이 동그라미로 만져지듯 추상의 벽돌을 쌓았었지

그것이 비누든, 두부든, 감격하기조차 불편한 사회의 무지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대중이 정해놓은 표준치의 모범이 참이 아니라고 우겼었지

 

3

유지해야 하는 긴장의 무게 그 무게를 누가 가늠할 수 있을지 너는

방 안에 누워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쉽게 알 수 있다고 했었지

눈빛들이 달려오듯 정지선에서 임의적인 파란 불로 명제가 달려온다고 했었지

칼은 피를 먹고 자라 베인 손가락을 간질이고 있었는데도 온다고 했었지

 

4

목마른 물고기는 몸속 바다가 사는 곳에 살게 해달라고 애걸한다고 했었지

방 안에서 휴지나 쥐어뜯고 있어야 하는 자학이 기다림으로 변질되는 것처럼

끈질긴 생명력의 풀잎 같은 수염을 매일 아침 풀 뜯듯이 뽑기도 했었지

그날 전화기 불빛만 어둠 속에서 심해 물고기 눈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었지

익지 않고 사는 법

 

 

 

새벽 2시에서 3,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걸 알아, 방엔 선사시대 동굴 벽화 같은 벽지가 곰팡이로 가득 피어 있고, 문살이 부러진 자리엔 숫자가 뒤죽박죽된 달력이 붙어 있어, 천장에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지자 담배가 사그라지듯 그림자가 힘없이 주저앉는 거야,

 

기울고 있는 반대쪽에 힘을 실어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이 기우는 쪽을 몰라, 그 끌림이 사랑일 때도 있었지만, 증오나 분노일 때도 있었어, 몸이 균형을 잃었을 때, 기울었어, 내 몸이 그림자가 두려워 버리고 달아난 너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어,

 

소낙비가 쏟아지려는지 한두 방울 지붕을 때렸어, 누가 그랬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물이라 하지 않고 비라고 하는 이유를, 산 위의 빛깔이나 물속의 맛을 느끼는 여운 때문이라고, 차가워지는 것과 따뜻해지는 것은 조금씩 나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이라고, 너무 익으면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가능성

 

 

 

밧줄

같은 그림자가 목을 휘감고

찔끔거리는 오줌 줄기 속

성욕은 단단한 콘크리트에 매몰되어

성숙한 척해도 벗겨보면 어린애 같은데

박테리아에서 짚신벌레로

짚신벌레가 개구리로

개구리가 뱀이 되어

내게 알지 못하는

수화만 보내고 있는데

단절의 두려움에 떨던 녹음기처럼

어제 저 너머에서 죽은 내가

내일은 여기에 살아있을 것

같은

 

 

버틴다는 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먹구름 속에서

새파랗게 날 선 눈빛으로

납부한 고지서 다시 날아온 것처럼

불쾌한 얼굴로 쳐다보며

씹으면 터지는 미더덕의 희생이 있었다는

휘황한 이불 섶 터지는 소리에

팔뚝 언저리엔 소름이 돋고

손가락 끝이 은색 메스가 되어

가슴을 절개하듯 쓰다듬을 때

장님이 소중하게 점자 편지 만지듯

암세포가 폐의 표면을 부드럽게 잠식해

잔혹한 상실로 다가오는 비참한 기분일 때

텔레비전 세상은 반복적으로 같은 소리만 지르고

사랑이 없는 인간은 치유될 수 없듯

흉포해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듯

오른쪽 귀만으론 세상 소리 듣지 못하고

듣기 싫을 때 듣는 것처럼

버틴다는 것은

두 발로 땅을 밟는 것이 아니라

서 있어야 된다는 것을

 

소리 없이 기어드는 이방인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방들이

일제히 빛을 향해 달려들 때

어둠이 말을 건다

요람 앞에는 숲이 있고 요람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가 있다고 믿지만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방인과 동거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과 거리를 만지작거리듯

 

열매 열리면 꽃 지고

달 기울면 흔적 없이 사라지듯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강함이 강하다는 것은 강하지 않음이 존재하므로

꼿꼿했던 고개가 꺾이는 강아지풀도 새벽이면 흰 서릿발에 젖겠지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아주듯, 어려움과 쉬움은 이루어 주고,

높음과 낮음은 채워주고, 앞과 뒤는 따르게 해주겠지

 

소리가 있으면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면 풍경이 들리고,

창살에 비치는 달빛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야만 볼 수 있겠지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의 진실은 불편했지만 거짓말은 나를 흥분시켰다.

우리 사랑이 강 앞에 있다고 하는데 너는 뒤에 있다고 했다.

가슴속에 있었다고 하다가, 없다가도 했다.

화면조정시간, 화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앞뒤 구분이 없는 것처럼

아이들이 집 그림을 그리면 지붕부터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생각 없이 빨아대던 사탕처럼 나는 이리저리 빨리던 사탕이었다.

너는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숨길 게 많았다.

그래서 너의 위로는 진정한 애증이 아니었다.

음습한 곳의 곰팡이처럼 건조하게 살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을

물 스며들듯 살을 섞었으니 너의 품도 따뜻할 수 있었겠지

우리가 맺은 관계의 넓이가 누릴 수 있는 낭만만큼의 크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는 세상에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세상을 너에게 맞추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지

우직한 어리석음은 지혜와 현란함의 바탕이 되었겠지만

너의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었고, 너의 불편함 또한 흐르는 강물이었다.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담고 있는 추억의 강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잠들지 못하는 물이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살려는 것의 명제라는 것을, 나는 너의 중간쯤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 지점은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 풍요에 나는 너를 가두어 버렸다. 바로 앞에서.

 

 

 

낙타와 고삐

 

 

 

사내가 낙타를 타고 있다. 낙타 궁둥이엔 파리가 집을 짓고 있다. 낙타의 질기고 질긴 생존이다. 낙타가 땅속으로 하관하면 궁둥이엔 구더기만 득시글거리겠지. 파리들이 모여 낙타의 길을 막겠다고 앵앵거리는 것은 쓸모없는 짓일 수도 있지. 가끔 꼬리를 휘젓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만, 파리 때문에 길을 헤매는 법은 없다. 낙타는 어제도 제 길을 걸으며 갔다.

 

사막에서 사내가 주고 간 낙타의 고삐를 얼결에 받아 쥐었다. 몇 년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에 대해, 삼백육십오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내, 몇 년 전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 지나온 시간을 단순 요약했다. 이제 사막을 통과할 때가 되었다. 그때 불쑥 나타난 낙타 주인이 고삐를 돌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사내는 그녀에 대해 모를 때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불안함이 자신의 심장 모서리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떨렸다. 끊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돌아오는 단절처럼, 그녀의 기억에 오래 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였다. 아니다. 오래도록 회자되고 싶었다. 누구도 주지 않는 상처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시멘트벽처럼 두터워지는 회색빛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상에서 하늘로 향해 증발할 것만 같다는 것을, 창문이 노을을 되쓰고 있었다.

 

까마득한 몰락의 벼랑에선 붉음이 최후였다. 사내가 죄라는 자양분을 먹고 사는 유기체라는 것을 그녀는 믿기 싫었다. 그녀는 사내를 떠밀지 않았다. 구경꾼도 없는데 늘 혼자 하는 마스터베이션처럼, 그녀가 황금을 선호하는 것은 종족보존의 본능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사내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내세우는 기득권에 대해 기권을 한 것도 일종의 선택이었다. 밖은 태풍이 그악스럽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그녀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그녀에게 부과된 형벌이란 것을 사내는 알지 못했다.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처럼

잠자고 있는 것을 흉내 내고 있는데

벌 한 마리 방 안에 들어와

머리 처박다 떨어졌다 다시 처박는데

열려 있는 문 보지 못하고 창호지만 두드리다

어느 사이 빠져나갔는지 모른다

의식이란 스스로 발라놓은 창호지 같아

진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하늘 높아 보일 때 사람들이 외로워 보여

높은 것을 싫어하듯

내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듯

돼지는 뒷걸음질 치며 악을 쓰고 있다

용서할 거리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현자(賢者)로 알려진 필론이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여행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났는데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위해 애를 쓰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필론과 배에 실린 돼지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대가 알고 있듯이,

어떤 소리를 들으면 어떤 색깔이 펼쳐지듯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새로운 것이 되듯이,

내가 만드는 세상과 이미 만들어진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다

 

숲의 나무를,

땅의 하늘을,

그대의 공간에서 생의 흐느낌이 비껴가지 않듯이,

동굴이 아닌 터널이 그대의 생이라도,

푸른색과 같은 푸른빛은 푸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듯이,

가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아침이 오듯이

 

 

치명적인 것은 어둠에 묻혀 있다

 

 

 

너의 등에 차고 있던 비수 같은 그림자는

찾아 볼 순 없지만

발정 난 고양이처럼

발톱을 보면 안다

눈빛을 보면 안다

얼마나 그 칼을 빼고 싶은지

그 절절함을

마주 보고 있는 네 눈빛마저

동조하듯 흔들리는데

어둠을 등에 업고 소리 없이 기어든 이방인처럼

말라버린 털로 위장한 채

돌 틈에 숨어 있는 삵 한 마리

발톱을 보면 안다

눈빛을 보면 안다

바다가 푸른빛을 잃은 적이 없듯이

 

TV를 보면서

 

 

 

썰어놓은 낙지 다리가 제각각 놀고 있고, 뒤끝이 오르가즘 뒤처럼 개운했고, 볼트 같은 시선이 내 눈을 파고들어, 이내 플러그가 쑥 빠지듯이 사라졌다. 포복하듯 시간은 축 늘어진 뒤, 뒷간 쥐한테 똥구멍을 물렸을 때 억울한 기억이 새득새득 튀어 나오고, 주위를 짬짬이 둘러본 뒤, 말라버린 가슬가슬한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있다. 익숙해서 조금씩 부패하는 정다움이 서먹함을 띤 채 제자리에 박혀 있고, 서편엔 키대로 포개진 산이 녹으면서 빠지고 있고, 그 사이로 삭아버린 검불이 낙숫물 고랑으로 흘러내려 검붉게 빛나고 있을 때, 만화 주인공들이 지구를 잘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2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긴 적이 없는 얼굴, 상대에게 의존하면 반드시 불행을 부른다는 직감을 믿는다. 우주가 이끈다는 자신감, 슬픈 꿈처럼 비가 내리고, 양파 같은 너의 맨발이 감자처럼 노란 발가락 사이를 열고, 반디의 무수한 불빛들이 이교도 무리처럼 은밀하게 명멸하고, 미확인된 비밀을 봐버린 것만 같이, 뒤집힌 배처럼 흰 속을 드러내는 잎사귀들, 장마 뒤의 비릿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고, 한낮의 연약한 그늘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요람 속의 아기거나, 거름 내 나는 보잘 것 없는 풀꽃들이거나, 그 현기증은 서늘하고 어두운데, 그 얼굴은 햇살을 받아 허공에서 설탕 녹아내리듯 가슴이 미끄러졌다. 상추로 싼 밥을 밀어 넣을 때 막막한 표정처럼, 함부로 뭉친 머리카락이 푹 젖고, 문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울타리, 달빛 아래 마주한 하얀 빨래에서 느끼는 전율, 밖을 나서기 전 내 몫이라고 손에 쥐어주는 한 움큼의 한숨, 그걸 한나절 시간 위에 올려놓고 데굴데굴 굴리면서 기다렸다. 그 얼굴은 어둠을 빨아들여 언덕을 굴러다니는 눈뭉치로 부풀어, 달팽이가 되어 껍질 속에서 잠만 자고 있는 그 얼굴을 지우고 싶다.

 

 

선을 넘어서는 순간

 

 

 

아침에 빛들은 앞산에 내려앉았다. 매듭을 이은 산은 눈동자 속의 선으로 보이고, 산을 넘어가는 구름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고목은 알지 못했다.

 

시야의 정점에서 허상으로 펼쳐진 산과 선, 그 너머에는 꼬리를 달고 또 다른 산이 지나가고, 그 사이가 비어 있어 산은 선이 아니었다.

 

어둠이 햇살을 농락할 때, 보이지 않는 풀벌레 소리만 들리고, 어둠을 파고드는 고라니 소리 사이로 바람이 산을 넘고, 이슬과 시간이 섞이는 순간 바람의 선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낯설기도 한 정직한 눈빛, 헐떡이듯 목이 마른 눈빛, 깊은 슬픔에 젖어 초점이 흐린 눈빛, 시린 벌판을 홀로 걸어온 나그네의 눈빛, 적의와 두려움에 가득 찬 어린 짐승의 눈빛, 운명을 조준한 저격수의 고독한 눈빛, 외로움에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는 농익은 눈빛, 달려가 거친 사랑을 갈급하듯 외로움이 응축된 눈빛, 늘 자유를 동경하듯 배고픈 눈빛, 아픈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여인의 눈빛, 그 눈빛을 따라 들어간 눈 속의 눈빛,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에 박힌 저 눈빛은,

 

 

 

오필리아*

 

 

 

푸른색이 오로라처럼 엉겨 있고

고개 숙여 밑을 보니 푸른 물이 발가락을 물고 있었다

 

순간, 감이 좋았다

 

푸른색이 말문을 튼 채 주고받는다

색정이 뭔지 알아?”

생사의 마음이잖아

 

파란 불빛이 터지기 시작하자

숨어 살던 이끼들이

꽃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맞닿은 다리 위엔 푸른 경계의 흔적만이

참과 거짓을 구분하듯

 

저 너머엔 선도 아닌 것이

저 너머엔 길도 아닌 것이

의문의 꼬리를 물고 달려들고 있었다

 

여우의 눈빛을 닮은 푸른 그림자가

유성처럼 떨어지자 등 위에 타고 있던

아라한이 말문을 틀려고 하는

 

순간, 푸름은 바다 위로 떠올랐다

 

 

 

 

*오필리아: 셰익스피어 햄릿에 등장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그림.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

 

 

 

입을 오물거릴 때 그녀의 바람이 가랑이 틈으로 지나가고

시곗바늘은 바글바글 기어 다니고

두꺼비가 뱀을 삼켜 시간을 소화시키는 동안

발가락에선 개미가 기어 나오듯 간지러울 때

 

재떨이의 바스러진 꽁초는 화장한 그녀의 뼛조각처럼

감정이 농익었을 때 툭 건드리기만 해도 과육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그녀와 함께 걸었던 차일 같은 파란 하늘에서

꽃씨 하나 떨어져 꽃망울이 터질 것 같은 배꼽 위에서

사랑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풀밭인 양 뛰노는 소금쟁이의 사랑이 버거워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놓고 첫 섹스가 과하다고

사시사철 파도를 넉넉하게 모아 다스리다 풀어주는

그곳에 시간이 뛰어들면 모든 것이 물처럼 잡히지 않고

영원히 미끄러지기만 있는데

 

 

 

사바세계

 

 

너는 손가락 쥐고 태어나 손가락 펴고 죽듯이, 까무룩 잦아드는 놀을 바라보는, 네 얼굴은 발가벗은 목어 같았다. 네 발 밑에 땅이 움직이고 있었다. 뱀을 밟았는지 흙을 밟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후벼 파듯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억센 들풀은 다리를 친친 감아 당기고, 날개 달린 곤충들은 응답 없이 날아와 깨물었다.

 

어느 날 너는 국물에 빠진 머리카락이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네 것이라고,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하늘이 어디냐고, 하늘로 가겠다고 떼쓰는 것과 같았다. 소리로 태어나 소리로 살다 소리 없이 죽는다는 것을, 너는 그 세계를 알지 못했다.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편견

 

 

 

너는

장마 때 스며들었던

곰팡이를 제압하는 가뭄이

천둥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 천둥이 햇빛에 의해

소멸된다는 것도

 

그런 네가

햇빛을 죽이는 꽃그늘이 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체했다

 

잠이 찾아오면 아침이

반드시 오게 된다는 것도

 

그런 네가

지구의 중심이

아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늘의 주문(呪文)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꽃의 세상

 

 

 

선술집에서 사내는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에 시선을 둔 채, 얼버무리듯 끊고 맺질 못한다. 고뇌를 짜면 빛이 될 수 있고, 그 빛이 하늘을 나는 새일 수도 있는데…… 잠시 고개를 꺾더니 술잔과 마주 보고 있는 변신이란 책 위에 손을 얹는다. 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는데,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것인데, 꽃이 밖에서 오지 못하는 것은 숙명 때문인데……

 

순간 빈 잔을 머리 위에 올리더니 소멸해 간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달을 지고 강을 건너는 것이 업보라면, 숲속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은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취한 듯 휘청거리며 일어서던 사내는, ‘꽃의 세상이 지금이고 꽃의 그림자가 어제라면……중얼거리며 선술집을 나선다.

 

 

미안해, 미안해

 

 

 

말치레에

똬리를 비집고 나오는 실밥처럼

비실비실 헛웃음만 튕기고

허리를 비트는 웃음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엉그름진 신발 코는 꽈리 터지듯

소리 내고

옷 속에 감춰진 사연

상처마다 이유가 있겠지

주기와 강도를 축으로

비등점에 도달한 갈등의 그래프처럼

동적인 화면보다

한 장의 스틸 사진에 마음 끌리듯

게으른 식객이 밥상 치워버리고 난 뒤

뒷북만 치듯

눈꺼풀이 없는 고기는 눈을 뜨고

죽는다는 것을

너는 알고도 모른 체한다

기다리며, 싸우며, 잡는 법

 

 

 

문장을 마음에 담고 사는 그는

가슴에 향을 담듯, 그림이 시가 되듯

그 길을 가는 것 진심으로 가는 것

시간이 흐른 후에도 투명해지는 것

손가락이 사냥감을 잡아채기 위해

잠 속에서도 기다리며 눈뜨고 있는 것

 

잠이 술에서 깨어 술이 잠에 취해 있듯

쌀 포대에서 사람 냄새가 나듯

꽃이 핀 현실에 시가 스며 있듯

낡은 피아노 현이 눈에 묻혀 있듯

그윽한 소리가 차가운 귀를 열듯

서로가 서로를 위해 언어로 싸우는 것

 

유일한 나침반을 가슴에 품고 있는 그는

바람직한 것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

그 죽음이 별이 되는 것

별이 떨어지고 수만 년 빛을 쏘는 것

잡히지 않는 허공 속에 은하철도 타고

별 그림자를 잡는 것

 

 

사나이 눈물

 

 

 

젓가락을 잡으면 사분의삼박자가 되고 옥수수만 봐도 마이크로 착각하는 사내가 사나이 눈물을 애절하게 내지르며 철문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사내 뒤로 자신이 다니던 공장 굴뚝이 우뚝 서 있다. 그것이 사내를 더 추레하게 만들고 있다. 투명한 빨대를 사내 목덜미에 꽂은 채 가리지 않고 빨아대던 공장이었다. 아침 약수터 풀숲에 오줌 줄기 선사할 때의 상쾌함은 사라지고 사내의 팔뚝 솜털이 긴장감으로 일어섰었다. 애면글면 속 끓여온 해고 통지서를 손에 오그려 쥔 채 씨근벌떡거리는 숨소리, 세속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었던 고향의 물두꺼비와 수리부엉이와 하늘다람쥐는 자취를 감추고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사나이 눈물이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려 마음이 소금밭 되고 생짜로 상처를 문지르는 사내는 철문 앞에서 아직도 허리춤을 올리고 있다.

당나귀가 바라보는 세상

 

 

 

걸어가는 당나귀가 이른 봄 흙을 뚫고 마중 나온 처녀치마꽃을 지나자, 현란한 몸 색깔로 치장한 채 구술 꿰듯 이어진 더듬이, 외계인 같은 겹눈, 옴폭옴폭 파인 점으로 멋을 부린 딱지날개를 가진 벌레를 만났다. 그 길을 왜 가느냐고, 벌레가 물었다. 이 길을 택한 것은 사람의 발자국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곤 계속해서 살을 붙여 나갔다.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한 것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뜀박질하면 나 자신만 보이고, 걷다가 서면 벌레 소리 들리고, 죽은 개구리 곁에 앉으면 작은 우주가 보이고, 당나귀 눈엔 뭐만 보인다고, 숲속엔 잎만 먹는 녀석, 즙만 빨아 먹는 녀석, 썩은 나무만 먹는 녀석, 꽃가루만 핥아 먹는 녀석, 입맛에 맞게 부위 바꿔가며 먹는 녀석, 당나귀가 한마디 던진다, “저렇게 먹는다는 것은 오늘을 볼 줄 아는 것들이고, 내일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꽃길

 

 

 

솜처럼

말랑말랑한 꽃씨가

오랜 시간

땅속에서 뒤척이며

상처도 받지만

물이 스며든 외피에서

손처럼 생긴

파란 싹이

뻗어 나와 꽃이 된다

꽃이

손에서 빠져나간다

물이 빠지듯

조그만 꽃 한 송이

꽃은 손바닥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간 길을 알지 못한다

손이 남긴 따스한

느낌마저도

사라져버린 당신의

빈자리

 

 

 

 

그저 그렇게 사는

 

 

 

멋모르고 흘러가다 몸 닿는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홍합이나, 떠다닐 수밖에 없는 팔자로 태어나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멸치나, 밀물 따라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물에 든 꼴뚜기나, 아무도 기웃거리지 못하는 밀폐된 집을 소유한 달팽이나, 섹스 뒤에 할 일 찾지 못하는 그놈이나, 그저 그렇게 사는

 

 

그림자의 자세

 

 

 

밝은 것은 해에게로 돌려보내고

어둠은 그림자 속으로 돌려보내고

흙비는 티끌로 돌려보내고

밝은 곳으로 돌아가 버리면

밝지 않을 때 어둠을 보지 못하지

밝음과 어둠은 차별이 아니라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돌아갈 마음과 변함이 없다면

너는 그릇으로 변하겠지

그 밑에 가라앉아 있는 너의 움직임은

고요 속에 피어나는 안개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너는 다시

그림자로 스며들겠지

 

 

 

있음과 없음의 사이

 

 

 

열매 떨어지자 꽃이 필 때

 

낮달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꽃잎이 고개 흔들며 있음을 알릴 때

 

구름에 갇힌 낮달은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 사이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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