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집<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3부~4부/2021년 출간/시인동네

2023. 7. 26. 14:29이하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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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가지 시선에 대한 오류

 

 

 

이 세상 모두를 사랑으로만 바라보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사랑 때문에 다른 것이 죽어도 보지 못하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달과 장미

 

 

 

이 순간 웃고 있는 것은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라는 걸 알아.

걱정하지 마, 오늘 걱정은 오늘이 할 거야.

어제 고생은 어제로 충분하고, 이 몸은 목판에 놓인 엿가락이야.

가위로 자르든 엿치기를 하든 엿장수 마음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꽃은 떨어지지만 지지 않잖아.

 

내 발밑에 눈을 생각하면서 달을 보았어.

달이 껍질 벗은 복숭아로 보이는 거야, 고스란히 발가벗겨진 느낌

유통기한 지난 양념 통처럼 기분 나쁘게 끈끈했어.

내 몸이 달빛을 끌어 모아 밖으로 토하고 있었어.

내 육감은 빗나간 적이 없었어.

쓰레기봉투에서 풍기는 복잡한 음모의 냄새처럼

 

식탁에 앉아 맛도 없는 음식을 씹어 넘겼어.

여백의 원고지를 씹는 기분이었어.

하늘을 보았어, 달이 떠 있긴 했어.

말리고 싶은 달을 보며 커튼으로 마음을 닫았어.

밖으로 슬픔이 터져 나오는 거야.

축축한 습기를 혀로 핥아주고 싶었어.

파란 장미가 떠올랐어, 기억에서 사라진 상처 앞에

고개 숙이고 싶었어, 이유도 없이

 

 

 

그녀의 이름은 구름이었다

 

 

 

오줌 빛깔 햇살이 거미줄처럼 걸쳐져 있는 날, 뼛속 깊숙이 향나무 냄새를 품고 다니던 그녀를 만났다. 방사하는 유부녀 눈자위 같이, 어설퍼 보였다. 친했던 것에 대한 낯설어지는 경험이었다. 한번 간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절대적인 이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돌아왔다고, 구름이 하늘의 물이고 물이 땅의 구름이듯, 머무름 없이, 흘러가며, 떠돌았다고, 길을 가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으면, 돌아서서 다른 길을 찾듯, 뱀의 허물에 그려진 어지러운 연속무늬가 그녀의 살갗에 스멀거렸다. 스스로 꽂힌 자는 자신이 꽂힌 줄 모르고, 꽃의 향기마저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종이 위의 강을 걷는 것처럼, 비누거품 위를 미끄러져 가는 물방울이 되어, 덧없이 흘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그녀는,

슬픔의 길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루살이는, 황혼이 물드는 서쪽으로, 어둠에 갇혀 있는 치명적인 함정의 구멍을 돌고 돌아, 노을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깔따구처럼, 보이진 않지만, 이른 봄 출몰하여 연못으로 낙하하여,

그 먼 길

어딘가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떠나는

 

 

 

 

 

 

당신은 떠났지만 떠난 것이 아니었다

 

 

 

1

석류의 붉은 주둥이에서 염염한 빛이 튀어나오는 밤이었다. 뜬눈으로 개꿈을 꾸고 있었다. 목소리는 오갈이 든 것처럼 뒤틀려 있었다. 너에게 가기 위해 다시 너를 떠난다는 통보를 받았다. 초식동물의 눈은 맑고 순해서 슬퍼 보여 숲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서리 내릴 때를 알고 배추같이 입을 다물 줄 알았다면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2

항아리에 먹물이 들어차 있었다. 먹물 한가운데를 비집고 손톱만 한 반달이 돋아나 지붕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식은 국밥을 혼자 먹을 때처럼 차가움이 묻어났다. 모든 그리움의 상처를 달이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상처로 변한 그리움만큼 연못에 남아 떠오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던 것을 몰랐었다.

 

3.

등을 돌리지 말라고 했다. 등은 거부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등에 업히는 것은 뒤로 안는 것이라고 했다. 자루가 되어주기 위해 쇠는 나무를 해칠 수 없듯, 지는 놀 보며 해가 뜨는 것처럼 고백했었다. 그때 느낌은 지나치게 강렬했었다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였었다. 그것이, 쉽게 휘발되어 버릴 줄은 몰랐었다.

 

4

옷을 벗어 나체가 된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것, 숨길 수 없다는 것, 옷 속에 감춰진 원형을 밝혀주듯, 죽어서 사자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과 같았다. 고라니에게도, 부엉이에게도, 들개에게도 과거는 없다. 영원히 현실만 있다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럴듯한 복수였다. 당신이 즐기던 퍼즐게임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너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너는 여기에 나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둠에도 정조준 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가 늘 그랬던 것처럼

움직임을 순간에 포착해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물을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감고 보라고 한다

발정 걸린 똥개의 이빨을 보면 다 안다고 한다

나를 쳐다보지 마라고 한다

눈동자를 보면 속살이 보인다고 한다

얼마나 절절한지 아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흔들리듯 동조하듯 한다고 한다

음모를 감추고 꽃바람으로 온다고 한다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한 것처럼

믿음 속에서 이방인을 키우고 있다는 것도 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를 자꾸 쳐다보지 말라고 한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밖을 보라고 한다

너를 찾는 나를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라고

금낭화

 

 

 

당신에게 가기 위해선 당신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죽어야 문이 열린다는 것을

땅에서 바람으로 하늘에서 구름으로 만들어져 온 것

그 속에 당신의 무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에게서 연분홍 감정이 피어 나오는 것은

깊은 향기를 내는 제 뿌리입니다.

땅의 울림에서 깊숙이 박혀 있는 뿌리, 그것은 씨앗의 뿌리입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깨달음의 울림이고, 그 울림은 맑습니다.

그 맑음은 향기입니다.

차를 서너 사람이 마시면 그저 맛을 보는 정도이고,

둘이 마시면 잘 마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이란 이렇듯 마주 보고, 앉으면 따뜻해지고,

넉넉해지고, 미소가 번집니다.

줄기에 달린 등을 뿌리가 보듬어 안고 있는 한

당신 같은 멋진 문장은 태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그 시간

 

 

 

당신이 직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곡선의 일부라면

시선 때문에

우기는 것은 아닌가

잠시 나는 링에서

싸움을 그만두고

내가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네

의자에 앉아 입 안에

고인 피도 뱉고

물도 마시고 싶네

위에선 하늘이 소용돌이치고

그 너머엔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공허를 보고 있네

문 밖엔 산수유 꽃망울이

오들오들 터지듯

몸 비트는 소리 여린 듯

질기고 약하지만

진한 사람 냄새가

타는 시간이네

그 길은 안개였다

 

 

 

입을 최대한 벌렸다

안개의 기운을 몸속으로 끌어넣었다

안개는 말없이 흘러 들어왔다

잇닿아 흐르면서 지난 시간과 헤어지면서 다가왔다

새로운 시간을 맞아들이는 연습이었다

질곡에 닿아 있어도 새로움이 날개 치는

땅의 깊이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에게로 가듯

안개도 지나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이 다르지 않았다

그 길은 앞으로만 나 있어서 지나온 것을 쉽게 잊겠지만

안개는 늘 그 길을 더듬어 갔었고

가는 동안 그 길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 길을 지나고 나면

가물거려 지나온 길을 잊어 버렸다

 

그린다는 것은

 

 

 

쪽색 비단에 염소를 그려놓고,

사슴뿔에 하얀 구름 그려놓고,

운무 위에 원숭이를 그리다가,

멈추었다,

 

붉은 꽃들이

구멍 속으로,

달빛 속으로,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오죽(烏竹)은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은 얼어붙고,

구름은 비늘 같고,

호기심 그득한

눈동자만이 물잔 속

촛불같이 찰랑대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누군가 금을 긋는 것 같다

머리를 감지 않았을 때 두피의 근질거림 때문에

머리를 감다 손에 뭉쳐지면 사납게 뜯어서 변기에 처박는다

앞뒤 없는 장면이 내 인생에 끼어드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퉁퉁한 비닐봉지가 내가 아닌가 착각이 들 때

짓밟힌 빵 모양의 구두를 하수구에 처박는다

만날 때는 허술하게 비켜가고 잔상을 통해 마음속에 각인하듯

그 시간의 흔적을 고개 디밀며 눈을 굴리고

황량하고 거친 성대의 근육질이 엑스레이 음화같이

얼핏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벌레 먹은 이빨처럼 계단의 녹슨 난간은 그네처럼 휘청거리는데

벽이라는 벽은 스쳐간 가구들이 남겨놓은 고달픈 삶의

벽화들로 심란하고 어지럽다

빈집에 버려져 영양실조에 걸린 고양이의 파란색 눈을 닮아

파충류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실존의 자화상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섬은 기억하고 있다

 

 

 

붉은 손가락을 가진 너는

매년 찾아오는 감기에 걸리듯

사나흘 찾아왔다 사라지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지만

 

기타 줄에 걸린 점 하나에

온몸을 던지는 너에게

섬은 참회와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유배지겠지

 

헤어진 것은 헤어진 것이 아니고

버렸으나 버린 것이 아니라면

섬섬한 인연을

머리에서 지울 순 있어도

외로움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그 섬의 겨울은 내 겨울보다

차라리 황홀했음을

추위에 떠는 초라한 가지의 나무지만

봄이 되면 푸른 잎과

다시 손잡고 오겠지

이것이 본질이다

 

 

 

당신의 주머니 속 송곳이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이 아니듯

존재하지 않는 절대처럼 흑과 백이 색이 아니듯

진리는 없고 진리들만

넘쳐나는 것이

본질이다

4

경지에 오른 사내

 

 

 

행색만 봐도 거지상이고 뭔가 부족하지만 눈빛만은 살아있는 사내는 대낮인데도 동네 어귀 정자에 터를 잡고 병나발을 분다. 찢어진 비닐봉투 사이로 누런 손을 넣어 시뻘건 김치를 꺼내 한입 물더니 세상천지 이런 행복이 어디 있냐는 듯 얼굴은 보름달이다. 그 사내에게 손에 들고 있던 새우깡을 내밀며 안주라도 하실라우권했더니, 사내는 들은 둥 마는 둥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똥개한테로 시선을 주더니 나 들으라는 듯 한소리 한다. “개 불알이 저렇게 축 늘어져 있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지, 아마 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겠지, 사는 게 다 그런 것이지, 이렇게 개 불알 놀듯 건들건들 그러다 보면 세월 가는 거지.”

 

 

 

축산 할배와 워낭

 

 

 

올봄 고추밭을 갈아야 할 축산 할배가 소천하였네,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워낭에겐 청천벽력이네, 밭에 씨 뿌려주고 수확해서 여물 먹여줄 할배가 죽었으니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네, 축산 할배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워낭은, 먹을 것 챙기기 위해 개미도 이리저리 다니고, 제비도 덩달아 낮게 더 낮게 날고 있는데, 채찍에 길들여진 워낭은 할배 곁에서 떠날 줄 모르네, 그대로 두면 워낭도 따라 죽을 것만 같은데, 잡초는 일어서는 맛이라도 있지만, 몇 번이나 회초리로 때렸지만 워낭은 일어설 줄 모르네, 소 불알이 축 늘어져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안 떨어지네. 밤새 눈이 장독대 위에 쌓이듯이 그리움도 쌓여가고, 사는 게 다 그런 것이긴 한데, 워낭에겐 축산 할배가 자신의 일꾼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없네,

 

 

 

 

시간놀이

 

 

 

후평 할매가 콩을 줍고 있다

서리 앉은 밭고랑에

갈고리 같은 허리를 하고 앉아

얼굴처럼 말라비틀어진 콩을

한 알 한 알 주워 담고 있다

 

한 알은 다단계에 빠져 침을 튀기던 첫째 년을 위해

한 알은 퇴직금으로 주식 하다 망해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둘째 놈을 위해

한 알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홀아비로 환갑을 맞은 큰 놈을 위해

 

시간을 지키듯이

시간을 보듬듯이

시간을 삭이듯이

시간을 죽이듯이

 

할매는 시간놀이 하듯 콩을 줍고 있다

 

 

 

풍경

 

 

 

암으로 돌아가신 목성 할배네

기울어 가는 담장 안

늘어진 빨랫줄엔 옷가지 하나 없고

횡대로 앉아 부산떠는 제비들 사이로

빛바랜 카네이션이 연도 별로 집게에 코가 꿰인 채

만장 펄럭이듯 자식들 얼굴이 그네를 타고

시간의 무게에 퇴색되어 가는 카네이션 자막

어버이 은혜 감사합니다

 

 

 

 

검정 고무신

 

 

 

기차표 고무신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겨드랑이에 박혀 있던 숭고한 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허상이

빛바랜 몸빼바지에 뭉쳐지던 잔상들

불어터진 보리마냥 갈라짐이 뚜렷한 불안과

그물 같은 궤적으로 보리밭을 질러오던 실바람에

갈봄 없이 다가올 주름 파인 보릿고개

하얀 세월을 이랑에 뿌린 증거처럼

산맥의 줄기를 보듬고 있던 갈라터진 손

들쭉 향에 지장보살처럼 바라보던

틀어진 입에 대한 절절한 애정 그대로

비를 멈추고 빛으로 칸살이 하듯

느슨한 덤이 비껴서 가슴으로 파고들던

검정 고무신

문답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시고

마지막 선비로서 자존심 지키시던 석천 할배

장맛비 그치자 장죽을 뒤에 꽂고

광에 있던 곡괭이 들고서는 따라 나서라 하신다

 

논둑길 걸으며 한 음절 던지시는데

너 등에 비치는 햇빛은 네 어미의 가슴인 줄 알아라

할배요! 그기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니더

니 머리통 커지면 그때 곰곰이 생각해보거라

 

도랑물이 빠지도록 곡괭이로 돌멩이를 치우자

갑자기 튀어 오른 개구리를 보시고는

이놈도 니 맨치로 답답했던 모양이다

할배요 바람이 부니 억수로 시원하지요?”

 

이놈아! 잊지 말거라!

나중에 이 바람이 지나가거든 니 에미 손길인 줄 알거라

 

 

어쩔 수 없는 선택

 

 

 

어매가 잠이 덜 깼는지 툇마루에 앉아 안개를 품고 졸고 있다. 눈꺼풀이 처진 채 잘랑잘랑 비벼대며 춤추는 잎새들 가락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담장을 경계로 서 있는 앵두나무도 실바람에 흥을 돋운다. 달군 봄볕이 하염없이 쪼일 때 물이 나오지 않는 마당의 수도꼭지는 얼마나 고요한지, 깨알 같은 하루살이 등에 푸른빛을 내는 쇠파리 되어, 밭고랑 사이를 드나드는 작은 움직임에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다니는 앉은뱅이 의자, 밤나무 숲엔 비에 젖은 소쩍새가 간절한 소리를 지르고, 키 작은 풀꽃 사이를 잠시잠시 나는 곤충들만큼, 조그맣게 다가오는 어매 가슴엔 종기만 한 섬 하나 떠 있다. 안고 가야 되는데 안을 힘은 없고 고기 굽는데 고기는 없고, 어매 몸뚱이 누워 있듯, 없다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다시 태어나 허물 벗을 때는 자식이 보인다고, 그림자만 드리운 채 아무것도 보질 못한 채, 몸은 노을로 다가가고 정신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굽은 발은 여전히 잠에 붙들려 있는데,

 

 

 

 

 

봉선화

 

 

 

그대여

나를 건드리진 마세요

고요 때문에 슬퍼하는 그대여

고통은 야단법석과 같아

고요로 다시 피어나게 할 수는 없어요

허공도 꽃망울을 터뜨리진 못해요

싹트는 꽃씨가 고통 때문이라면

둘이 아닌 이 세상에서

고요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대여

만날 수 있는 그곳엔

갈 수 없어요

상사화

 

 

 

푸른 잎이 청포 입은 듯

촉촉한 달무리 사이로 얼굴을 묻으면

무성한 줄기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햇살이 따가워지면 언제 사라졌는지

잎은 땅으로 내려앉는다

잎이 지고 난 뒤 분홍 꽃대는 눈이 부시도록 꽃술을

꼿꼿이 들고 알몸을 드러낸다

땅으로 내려앉은 잎으로 덮어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얼굴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진다

꽃은 보면서 지는 잎이 거름 되어줬다는 걸 왜 못 볼까?”

, 그 잎

하얗게 말라 꽃씨를 온몸으로 보듬어주던

따스함

 

 

고백

 

 

 

몰래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는 아직도 몸속에 결을 품고 있었다

거미가 체중이 지치도록 거미줄을 풀어내듯

그 결을, 가슴에서 뽑아내고 싶었다

병실 틈으로 산란하게 기어드는 한 줄기 빛처럼

어둠의 복도를 따라 빛은 가늘게 뻗어나갔다

결 뭉치는 단단하게 뭉쳐졌다 풀어지면서 가볍고 부드러워 지고 있었다

그 결을 만지면서 허물어진 손등의 무수한 점들이 눈물로 희미하게 보였다

꼿꼿하게 누워 있는 어머니의 허리는 병원 옆 철길을 달리는 침목 같았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전

어머니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귓불로 어눌한 목소리가 전율로 흘러들었다

도마뱀이 몸속으로 기어 들어오듯 등골 서늘한 목소리

건너편 침대에 아배 눈을 닮은 곰 인형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결이 녹아내리듯 이승에서 마지막 내뱉은 그 울림은

허공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제망매가

 

 

 

먼저 간 자식 머리에 얹고 초록 숲을 보면 가슴이 아려 쳐다보기 싫다 하고, 먼저 간 자식 가슴에 묻은 채 무지개 보며 보이지 않는 반쪽 뿌리 찾겠다 하고, 먼저 간 자식 눈에 넣으며 굴러가는 바퀴만 봐도 같이 굴러가고 싶다 하고, 먼저 간 자식 보내놓고 붉은 그림자 엉겨 있는 발끝에는 불이 타오른다 하고, 얼어붙은 하늘이 맞닿아 있는 그곳엔 구름나무 숲이 되어 있는데, 가지와 잎은 나무 사이로 둥근 테를 두른 채 손을 맞잡고 있는데, 붉은 꽃들의 그림자는 하늘 속으로 하염없이 흘러만 가고 있는데,

 

 

 

걸어가는 길

 

 

 

안동장날 제사상 차릴 제물 사러 가는 길, 신작로를 따라 가던 어매는 아배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뒤쳐져 걷는데 퍼뜩 안 오고 뭐하노?” 아배의 지청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늘 먼저 앞서 가던 아버지, 잠시, 기다린다. 어매가 뭔 걸음이 그리 빠르니껴?”

 

아배가 폐렴으로 저 세상으로 가던 날, 눈물 한 방울 없이 발인에도 들어오지 않고, 영정 앞에 초점 없이 앉아 계시던 어매, 꽃상여가 장지로 올라갈 때도 뒤쳐져 따라 오시던 어머니, 봉분을 쌓고 아배 옷가지를 태우며 부지깽이를 들었던 손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때 느그 아배는 맨날 앞에서 퍼뜩 오라 카디만 저래 먼저 가네.”

 

과대포장

 

 

 

화산자락 병산서원 마당에 붉은 배롱나무 앞에서

팔순이 넘은 남녀가 인증 샷을 찍다가

할매가 배를 잡고 얼굴을 찡그린다.

나 지금 급한디! 통시가 어디 있능겨?”

할배가 히죽거리며 손가락이 밖을 향하는데

달팽이 뒷간이라고 있는디, 죽여주는 곳이제!”

할매가 급한데도 할배는 굳이 설명을 붙인다.

첨과 끄트머리가 멍석 말아놓은 것같이 생겨 달팽이 통시라고 하는디,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생각하제. 그게 문이 없어서 그렇탕께! 나가 문 앞에서 서 있을 텡께 걱정하덜 말어야!”

할매는 달팽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할배는 밖에서 망을 보는데

영감! 하늘이 다 뚫렸는디 낮달이 날 쳐다본당께!”

그려, 구름도 보이제. 신경 끄고 언능 싸랑께!”

알았는디! 영감! 나가 시방 뀐 소리는 거창한디 나오는 게 쪼깬한데, 영감은 이럴 때 뭐라고 했는디!”

과대포장!”

빅뱅

 

 

 

목욕탕 다녀온 집사람이 밥 먹다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던진다

나 허벅지에 있는 점 뺄래!”

뜬금없는 말에 숟가락을 놓고 말을 받는다

누가 그 점 보고 뭐라 카드나?”

그게 아이고, 어떤 할매가 흉점이라고 악연이라 카든데, 당신하고 나 악연이가?”

뭐라카노, 당신하고 산 게 몇 년인데. 점이라 카는 거는 생각하기 딸렸다 아이가. 우주에서 보먼 지구도 창백한 점으로 보인다 카드라. 당신은 지구를 품고 사는 거 아이가.”

알았다! 고마해라! 생각 좀 해보고…… 앞으로 당신 날 무시하지 마래이. 그 순간 고마 지구 뿌사버릴 꺼다.”

우는 나무

 

 

 

마당 뒤편에 우는 나무 한 그루 있다

그림자를 품은 채 울고 있다

울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고

울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 현실은 시작된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나무를 흔들어 주면 우는 나무 등걸에선

안개가 눈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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